북경대학, 국립대학이란 무엇인가


국립창원대학교 사학과  손성욱


  1918년 12월 17일, 북경대학 법과대학 대강당 문이 열렸다. 개교 20주년 기념식을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한림 출신 독일 유학파 채원배 교장의 부임 2년을 앞둔 시점이었다. 1912년 그는 중화민국 초대 교육총장(교육부장관)으로 제정한 「대학령」 1조에서 “대학은 심오한 학술을 가르치고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의 필요에 부응함을 그 종지(宗旨)로 삼는다”고 밝혔으며, 북경대학 교장으로 취임하며 이를 재차 확인했다. 허언이 아니었다.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부임 당시 5년 뒤를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개혁이 아니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개교 기념을 원했다. 막 완공된 붉은 벽돌 건물 ‘홍루(紅樓)’에서 활동하며 각성한 청년들의 요청이었다. 게다가 한때 한 지붕 아래 있었던 북경고등사범학교(현 북경사범대학)도 독립한 1908년을 기점으로 9주년 개교 기념 행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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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북경대학 개교 20주년 기념 촬영, 1918년(『國立北京大學廿周年紀念冊』)


  갈 길이 멀었으나 채원배는 학생들의 뜻을 받아들여 20주년 행사를 열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법과연구소 교원 왕총혜는 지난 20년의 세월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나의 제도가 시작되어, 어떤 것은 폐지되거나 중단되고, 어떤 것은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기도 했다. 홀로 우뚝 서서 지금껏 남아있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북경대학뿐이며, 20년 동안 끊어짐이 없었다.”

  수많은 학당이 명멸하는 격변기였다. 그 속에서 북경대학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생존의 과정은 곡절의 연속이었으며, 자랑스러워만 하기엔 멋쩍은 과거였다. 전 교육총장 범원렴은 북경대학을 “중국의 유일한 국립대학”이라 치켜세우면서도, 학문을 이익과 관록의 길로만 여기는 구습이 여전함을 통탄했다. 문과 교수 마서륜 역시 “세상이 우리 대학을 헐뜯은 지 오래되었다”고 자조했다. 그들에게 지난 20년은 딛고 일어서야 할 치욕이자, 청산해야 할 과거였다. 도대체 대학이란 무엇이며, 국가가 세운 대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제국의 몰락과 공화국의 탄생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단층 위에서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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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경사대학당 현판(출처: 위키백과)


  북경대학의 전신인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은 1898년 무술변법의 산물로 탄생했다. 청일전쟁 패배라는 국가적 치욕을 씻기 위한 구국 운동의 결정체였으나, 태생적으로 황실에 종속된 기관이었다. 학생들은 ‘나으리(老爺)’라 불렸고, 체육 수업에서조차 관료적 위계가 작동했다. 1905년 과거제 폐지는 역설적이게도 대학을 근대 학문의 전당이 아닌, 과거를 대체하는 출세의 사다리로 변질시켰다. 학생들은 학문이 아닌 벼슬을 탐했고, 교수들은 학자라기보다 관료에 가까웠다. 제국은 대학이 필요했으나, 대학은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격변기에 생존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급변의 시대에 변화의 가능성이 보였다. 1903년 러시아의 만주 점령에 항의하며 터져 나온 학생들의 ‘거아운동(拒俄運動)’일 일어났다. 민족 위기에 각성한 목소리였다. 그들의 외침은 경사대학당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황실의 대학이 민족의 대학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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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국립북경대학 교문, 1910년대(출처: 위키백과)


  1912년 신해혁명으로 공화국이 들어서며 대학당은 ‘국립북경대학’이 되었다. ‘국립’이라는 간판은 무거웠다. 황실의 지원은 끊겼고, 들어선 공화국 정부의 재정은 여의치 않았다. 원세개(袁世凱)의 북양정부는 대학을 관료 양성소 정도로 생각했고, 심지어 재정난을 이유로 폐교까지 시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립대학’의 정체성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아닌, 국가의 방기와 폐교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교수 월급이 끊기고 폐교 얘기가 나올 때마다 구성원들은 뭉쳤다. 엄복(嚴復) 교장이 “문명국가에 대학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폐교안을 막아냈다. 1913년 하율시(何燏時) 교장 퇴진 운동과 본과 폐지 반대 투쟁을 거치며 구성원들은 깨달았다. 대학은 정부의 소유물이 아니라 지켜할 ‘공적 자산’임을 말이다. 학풍은 타락하고 기강은 해이해졌을지언정, “유일한 국립대학을 없앨 수 없다”는 절박함은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렇게 1912년부터 1916년까지의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훗날의 폭발을 위해 에너지가 축적되던 인고의 시간이었다.

  생존의 에너지는 1917년 채원배의 교장 부임과 함께 폭발했다. 그는 “대학은 심오한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라 천명하며 벼슬을 위해 대학에 오는 자는 떠나라고 일갈했다. ‘사상자유, 겸용병포(思想自由, 兼容幷包)’ 원칙아래, 혁명가 진독수와 보수주의자 고홍명, 그리고 신문화운동의 기수들이 한 울타리 안에 공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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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채원배(『國立北京大學廿周年紀念冊』)


  1918년, 마침내 ‘홍루’가 완공되었다. 본래 기숙사로 설계되었던 이 건물은 채원배의 결단으로 강의실과 도서관, 연구소가 집결된 변혁의 심장으로 탈바꿈했다. 근대적 공간 ‘홍루’의 탄생은 대학의 기능을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통합시켰다. 이대조(李大釗)가 관장한 도서관에서 청년 모택동이 신사상을 접했다. 모택동은 신문화운동의 핵심 인물이라 하기엔 어렵지만, 홍루는 분명 그와 같은 청년을 각성시키는 공간이었다. 신조사(新潮社) 사무실에서 학생들이 잡지를 찍어내던 그 순간, 북경대학은 비로소 관료 양성소라는 낡은 껍질을 깨고 명실상부한 ‘국립대학’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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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구 북경대학 홍루, 저자 촬영


  훗날 호적(胡適)은 경사대학당에서 국립북경대학에 이르는 초기 20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1948년 개교 50주년 기념사에서 그는 북경대학이 한나라 태학(太學)의 후예를 자처하며 2천 년의 역사를 뽐낼 수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북경대학은 굳이 무술변법이 일어난 1898년을 기원으로 고집했다. 호적은 이를 두고 “대단한 지기(志氣)”라고 평했다. 2천 년의 권위에 기대어 낡은 제국의 수호자가 되느니, 비록 나이는 어릴지언정 개혁을 위해 태어난 ‘신정(新政)의 유복자’임을 자임하겠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시경』의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구절처럼, 오래된 문명국 중국을 ‘유신(維新)’하는 것이야말로 대학의 존재 이유임을 천명한 것이다.

  ‘북경대학의 20년’, 대학이 무엇인지, 국립대학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국립대학은 국가가 세웠으니 응당 통치자의 논리에 휘둘려야 하는 대학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국가의 가치를 구현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현실의 논리에 국가의 이상과 가치가 훼손될 때 그것을 지켜야 하는 책무가 있는 곳이다. 권력에 종속되지 않고, 시대의 모순에 가장 먼저 반응하며, 위기 속에서도 학문의 존엄과 사회적 책무를 스스로 증명해 내는 곳이어야 한다. 왕총혜가 말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 것은 낡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치열한 생존과 변혁의 정신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국립대학은 무엇인가. 100년 전 북경의 붉은 벽돌 건물, 그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웠던 청년들의 뜨거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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