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과 도덕 : 청말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의 관찰과 사고
국립부경대학교 사학과 강사 손자영
1. 들어가며
중국 근대사는 어떤 의미에서 중국이 끊임없이 서양 문명의 충격에 대응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기점으로 동서양의 문화 교류가 시작되었고, 아편전쟁 이후 서양 문명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중국의 선진적 지식인들도 점차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유입은 열강의 견고한 함포와 함께 이루어졌고,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중국 문화에 위협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여 민족적 위기를 촉발했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미래 발전 방향에 대한 위기의식이 보편적으로 생겨났다.
당시 중국인들이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딜레마는, 한때 열등하다고 여겼던 서양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국가의 자강을 위해 서양을 배우고 기존의 사회경제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피했으나, 이는 곧 오랫동안 견지해 온 유교 사상에 대한 전면적 도전을 의미했다. 서양의 부강을 배우는 것이 서양의 도덕과 사상까지 수용하는 것을 포함하느냐의 문제, 즉 유교적 신념을 지키는 동시에 국가의 부강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시대적 난제였다. 대다수 중국인에게 서양의 사상과 가치관은 유교 도덕의 본질과 양립하기 어려웠으므로, 문제는 유교적 신념을 보호하는 동시에 국가의 부강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본문에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근대 역외 영국 유기(遊記)를 주요 사료로 삼아, 청말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이 영국의 부강 경험을 학습하면서도 유가 도덕을 지키려 했던 사고방식과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문화 간의 교류와 상호작용, 역사의 상호 연결성, 그리고 역사 속의 공통 주제에 주목하며 청말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의 관찰을 이해하고자 한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를 뽑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1)
2. 부민(富民)의 장, 박람회
“군자는 의에 통달하고, 소인은 이에 통달한다”(君子喻於義, 小人喻於利). 이것은 유교 사상의 기본적인 의리관이다. 당시 완고파는 서양 과학기술 수용을 ‘의리지변’(義利之辨)을 근거로 반대했으나, 일부 중국인들은 서양의 근대 경제 기술을 배우는 것이 국가의 부강을 촉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설복성(薛福成)은 ‘자강을 도모하려면 먼저 부를 추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서양의 부 추구 방식을 배우는 것이 자강의 선결 과제임을 역설했다.
박람회는 생산물의 개량과 상업 진흥을 위해 여러 물품을 전시·경연하는 장이다. 청말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은 박람회가 기술과 국가 부강을 촉진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농업 관련 박람회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곽숭도(郭嵩燾)는 레딩(Reading)의 종자 박람회를 통해 서양 농업이 상업과 결합하여 발전했음을 발견하고 서양인이 상업적 이익만 추구하고 농업은 소홀히 한다는 기존의 편견을 수정했으며, 해당 종자를 이홍장(李鴻章)에게 보내고자 시도했다. 설복성은 중국의 ‘근본을 다스리는 방법’(務本之道) 중 하나로 서양 농업 기술의 학습을 강조했다.
가축 전시회(The Cattle Show)에 대해서도 많은 중국인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왕도(王韜)와 유서분(劉瑞芬)은 박람회의 경연을 통해 농상(農商)이 날로 발전하고 사농공상이 각자 본업에 온 힘을 다하게 된다고 기록했다. 이에 더하여 빅토리아 여왕과 웨일스 왕자 등 영국 왕실이 박람회를 방문하여 격려하는 모습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많은 중국인은 이를 “백성이 부유해야만 국가가 부유해지고, 군주도 부유해질 수 있다”라는 유교 전통의 부민(富民) 사상으로 해석하며, 박람회를 사적 이익의 장이 아닌 국가 부강을 증진하는 공적 공간으로 이해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도 박람회를 ‘기이한 것’(奇)의 전시 공간으로 여기던 것과 비교할 때 훨씬 선진적인 시각이었다. 국내의 진치(陳熾)와 정관응(鄭觀應)이 유교 고전을 인용하며 박람회 도입의 사상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 것과 달리, 영국에서 박람회를 직접 목격한 이들은 이를 사회 통합과 부민 실천의 현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림 1. 가축전시회]
<출처> The Illustrated London News, Saturday, Dec. 6, 1851.
3. 인애(仁愛)의 마음, 영국의 교도소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은 펜턴빌 교도소(Pentonville Prison), 뉴게이트 교도소(Newgate Prison), 홀로웨이 교도소(Holloway Prison), 교정원(House of Correction) 등 다양한 유형의 감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교도소의 위생 상태가 훌륭하고 죄수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죄수들에게 침구와 생활용품이 완비되어 있고, 노동을 ‘학습’하게 하며, 식사와 산책 시간이 보장되어 신체와 정신 건강이 강화된다고 보았다. 특히 피아노 반주와 함께하는 예배 시간을 보고 “예악(禮樂)을 통해 훈도한다”라고 해석했는데, 예악 교화는 유가 덕정(德政)의 중요한 요소다. 실제로 영국 교도소 역시 종교의식을 통해 죄수를 교화하려 했으므로, 유석홍(劉錫鴻)이 유교적 관점에서 서양식 예배를 바라보았다 하더라도 그 본질적 의도는 영국 교도소의 교화 목적과 다르지 않았다.

[그림 2. 펜턴빌 교도소 예배당]
<출처> Henry Mayhew and John Binny, The Criminal Prisons of London, 1862, p.133.
중국인들의 영국 교도소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를 살펴보면 대부분 긍정적으로, ‘인의’(仁義), ‘인애의 마음’(仁愛之心), ‘예의범절’, ‘교화’, ‘교육’ 등의 표현이 주를 이룬다. 유석홍은 교도소에서 교육받고 교화된 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성과를 낼 수 있고 바르게 생활하기 때문에 런던의 백성들이 대체로 모두 평온하고 부지런하다고 보았다. 이는 실제로 영국의 교도소 개량을 이끈 존 하워드(John Howard)가 의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아가 몇몇 중국인은 청나라의 교도소 제도의 개선을 주장하거나 실제로 이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여, 청말신정 시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선구안을 보이기도 했다.
4. 부강의 희망, 초등교육
중국인들은 영국의 여러 학교를 방문했는데 특히 자선 학교를 많이 방문했으며, ‘교민’(敎民)과 ‘양민’(養民)의 관점에서 이를 해석하고 국가의 부강과 연결했다. 이는 실제로 당시 영국 초등교육이 지향하는 사상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영국 학교의 학생들은 정연하고 엄숙했으며 『예수경』을 낭독했다. 이는 기독교 ‘덕육’(德育)의 목적이 있었다. 자선가가 설립한 해군 학교를 방문한 중국인들은 인재 양성의 가능성에 감탄했고, 입스위치(Ipswich)에 위치한 자선 실업 학교를 방문한 유석홍은 “의숙(義塾)이 많으면 도둑이 적다”라는 현지 시장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장덕이(張德彝)와 설복성 또한 교육을 통해 백성의 지력을 향상해 각자 직업을 갖고 본분을 지키게 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영국에서 대중 초등교육은 교회 자선 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산업혁명과 도시화로 빈곤 아동이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은 상류 계급에게 게으르고 무지해 보였고, 일종의 악으로 비쳤다. 교회는 자선 학교를 곳곳에 설립하여 하층민 자녀를 경건한 기독교인이자 상류 계층에 충성하고 순종하는 시민으로, 근면한 노동자로 양성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1870년 「초등교육법」 이후에도 직업교육의 성격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청말 중국인들은 이러한 영국의 직업 교육을 부강의 핵심 요인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실상 영국의 자선 교육은 부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도시화에 따른 하층민 유랑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사회 통제의 성격이 강했다. 중국인들이 이에 공감했던 것은, 영국 교육에서 유교적 교민·양민의 이상을 발견했던 것과 동시에, 그것이 실제로 당시 영국 교육의 배경과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5. 인의(仁義)로 부강해지다, 영국의 자선
청말 중국인들은 영국에서 다양한 자선 모금 활동에 초청받아 참가했다. 이들이 주로 접한 모금 방식은 편지를 통한 모금과 현장 참여 모금으로, 후자는 자선 공연·다회·만찬회·무도회·바자회 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러한 방식에 크게 감명받지 못했다. 다회와 만찬회는 실내가 붐비고 답답한 데다 계단을 자주 오르내려야 했으며, 자선 무도회는 중국 전통문화와 맞지 않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선 바자회에서는 여성의 미모를 앞세워 물건을 판매하는 방식에 불쾌함을 느꼈는데, 이는 중국의 보수적 관념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당시 영국에서도 순수한 선의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바자회에 참가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림 3. 자선 바자회]
<출처> Punch, 4 Aug. 1888.
영국의 모금 방식을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중국인들이 계속 참석한 것은 영국에서의 사교 관계 유지라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영국의 자선 활동 자체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지지는 국제적 구제 활동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중국인들은 영국인들이 도움이 필요한 여러 나라의 요청에 기꺼이 응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북 대기근 당시 중국 역시 영국의 구제를 받았는데, 영국 현지에서도 중국을 위한 모금 활동이 전개되었다. 곽숭도(郭嵩燾)·증기택(曾紀澤)·유서분(劉瑞芬) 등의 공사들은 이를 “인의(仁義)의 행동”으로 높이 평가했다. 유석홍은 “오늘날 영국은 인의가 근본임을 알고, 이로써 부강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는데, 유교 사상에서 인의는 최고의 가치로, 그는 영국이 바로 이 덕목을 갖춤으로써 부강을 이루었다고 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중국인들의 인식과 유사하게, 당시 영국 중상층 역시 자선 활동이 도덕적 교화를 통해 사회를 개선하고 국익을 증진한다고 믿고 있었다. 다만 이는 구조적 문제를 간과한 인식으로, 실질적인 효과는 크지 않았다.
6. 정을 통하다(通情), 영국의 정치
장기간 영국에 주재했던 중국 관원들은 영국 입헌군주제의 주요 특징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영국의 부강이 군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그들이 군주와 정부, 민중 간의 관계를 관찰하면서 군주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지위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영국 군주의 형상이 유가 이상 속의 덕치 군주를 연상시키면서 군주가 국가 부강을 주도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한 영국 왕실 구성원들이 자선기관을 방문하여 격려하고, 각지를 순례하며 민중을 돌보는 모습을 ‘덕’(德)으로 정치를 시행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림 4. 빅토리아 여왕 즉위 50주년 기념 행렬]
<출처> The Illustrated London News, Saturday, 25 June 1887.
특히 오랜 기간 영국에 머물렀던 장덕이는 에드워드 7세 시대 왕후 알렉산드라의 자선 활동에 주목하며 그 자비로움이 생모(生母)와 같다고 찬탄했다. 이러한 이미지는 유교 정치사상의 인정(仁政)과 ‘위민부모(爲民父母)’ 관념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 유교에서 이상적으로 보는 군민 관계는 군주가 백성의 부모로 여겨지고, 백성은 군주의 자녀와 같아서 서로 의존하며 긴밀하게 단결하는 것이다. 다만 중국인들이 영국 군주를 민본적 군주로 인식한 것은 유교 사상의 투영만이 아니라, 실제 영국의 역사적 배경과도 맞닿아 있었다. 조지 3세 시대 이후 왕권이 약화하면서 정치가들은 군주 권력의 기반을 대중화된 가부장제 위에 구축하고자 했다. 군주의 활동은 신문을 통해 모성적 돌봄과 연결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변화한 영국 사회에서, 군주의 방문은 군주가 공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국가를 단결시키는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영국 군주를 ‘덕치군주’로, 의회를 보조적 기구로 이해하며 이를 ‘상하통정(上下通情)’의 방식이라 칭하고 찬사를 보냈다. 또한 영국 민중이 정치에 적극적 관심을 두고, 군주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사교 예절이 고도로 발달한 점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여 해석했다. 많은 중국인은 영국의 부강에 도덕적 기초가 있다고 보았으며, 보수적 인사인 유석홍조차 영국을 더 이상 야만의 나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7. 나가며
영국을 여행한 청말 중국인들이 영국 부강의 원인을 탐구할 때, 도덕적 사고는 늘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도덕이 영국의 부강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그래서인지 부강과 상관없는 곳에서도 부강을 읽어내곤 했다. 이들은 민본주의(民本主義)에 기반하여 사고했고, 중국은 이미 도덕이 상당히 완비되어 있으니 이를 충분히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도덕적 사고는 단순히 유가 도덕을 고수하려는 의식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의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박애주의의 유행, 도덕적 삶의 추구, 자선 활동의 확산, 하층민에 대한 교화, 군주의 부모적 역할 강조 등 당시 영국 사회의 사상적 배경은 중국의 인의(仁義) 및 민본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즉 중국인들이 영국을 관찰할 때, 중국과 서양의 도덕관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으며, 그들 중 일부는 양국의 도덕이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은 영국이 부강해진 이유가 유가 문화와 유사한 도덕을 실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중국 역시 자국의 도덕을 충분히 구현하면 된다고 여겼다. 이처럼 영국의 부강 경험을 학습하는 것과 유가 도덕을 유지하는 것은 이들에게 큰 사상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 글을 통해 동서양의 도덕 가치와 사회 규범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도 어딘가 통하는 지점이 있음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동서양의 상호 이해가 더욱 깊어지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1)이하는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富强與道德: 晚清旅英中國人的觀察與思考」(北京大學博士學位論文, 2025)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 2026. Vol. 21
부강과 도덕 : 청말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의 관찰과 사고
국립부경대학교 사학과 강사 손자영
1. 들어가며
중국 근대사는 어떤 의미에서 중국이 끊임없이 서양 문명의 충격에 대응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기점으로 동서양의 문화 교류가 시작되었고, 아편전쟁 이후 서양 문명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중국의 선진적 지식인들도 점차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유입은 열강의 견고한 함포와 함께 이루어졌고,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중국 문화에 위협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여 민족적 위기를 촉발했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미래 발전 방향에 대한 위기의식이 보편적으로 생겨났다.
당시 중국인들이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딜레마는, 한때 열등하다고 여겼던 서양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국가의 자강을 위해 서양을 배우고 기존의 사회경제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피했으나, 이는 곧 오랫동안 견지해 온 유교 사상에 대한 전면적 도전을 의미했다. 서양의 부강을 배우는 것이 서양의 도덕과 사상까지 수용하는 것을 포함하느냐의 문제, 즉 유교적 신념을 지키는 동시에 국가의 부강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시대적 난제였다. 대다수 중국인에게 서양의 사상과 가치관은 유교 도덕의 본질과 양립하기 어려웠으므로, 문제는 유교적 신념을 보호하는 동시에 국가의 부강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본문에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근대 역외 영국 유기(遊記)를 주요 사료로 삼아, 청말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이 영국의 부강 경험을 학습하면서도 유가 도덕을 지키려 했던 사고방식과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문화 간의 교류와 상호작용, 역사의 상호 연결성, 그리고 역사 속의 공통 주제에 주목하며 청말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의 관찰을 이해하고자 한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를 뽑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1)
2. 부민(富民)의 장, 박람회
“군자는 의에 통달하고, 소인은 이에 통달한다”(君子喻於義, 小人喻於利). 이것은 유교 사상의 기본적인 의리관이다. 당시 완고파는 서양 과학기술 수용을 ‘의리지변’(義利之辨)을 근거로 반대했으나, 일부 중국인들은 서양의 근대 경제 기술을 배우는 것이 국가의 부강을 촉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설복성(薛福成)은 ‘자강을 도모하려면 먼저 부를 추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서양의 부 추구 방식을 배우는 것이 자강의 선결 과제임을 역설했다.
박람회는 생산물의 개량과 상업 진흥을 위해 여러 물품을 전시·경연하는 장이다. 청말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은 박람회가 기술과 국가 부강을 촉진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농업 관련 박람회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곽숭도(郭嵩燾)는 레딩(Reading)의 종자 박람회를 통해 서양 농업이 상업과 결합하여 발전했음을 발견하고 서양인이 상업적 이익만 추구하고 농업은 소홀히 한다는 기존의 편견을 수정했으며, 해당 종자를 이홍장(李鴻章)에게 보내고자 시도했다. 설복성은 중국의 ‘근본을 다스리는 방법’(務本之道) 중 하나로 서양 농업 기술의 학습을 강조했다.
가축 전시회(The Cattle Show)에 대해서도 많은 중국인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왕도(王韜)와 유서분(劉瑞芬)은 박람회의 경연을 통해 농상(農商)이 날로 발전하고 사농공상이 각자 본업에 온 힘을 다하게 된다고 기록했다. 이에 더하여 빅토리아 여왕과 웨일스 왕자 등 영국 왕실이 박람회를 방문하여 격려하는 모습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많은 중국인은 이를 “백성이 부유해야만 국가가 부유해지고, 군주도 부유해질 수 있다”라는 유교 전통의 부민(富民) 사상으로 해석하며, 박람회를 사적 이익의 장이 아닌 국가 부강을 증진하는 공적 공간으로 이해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도 박람회를 ‘기이한 것’(奇)의 전시 공간으로 여기던 것과 비교할 때 훨씬 선진적인 시각이었다. 국내의 진치(陳熾)와 정관응(鄭觀應)이 유교 고전을 인용하며 박람회 도입의 사상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 것과 달리, 영국에서 박람회를 직접 목격한 이들은 이를 사회 통합과 부민 실천의 현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림 1. 가축전시회]
<출처> The Illustrated London News, Saturday, Dec. 6, 1851.
3. 인애(仁愛)의 마음, 영국의 교도소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은 펜턴빌 교도소(Pentonville Prison), 뉴게이트 교도소(Newgate Prison), 홀로웨이 교도소(Holloway Prison), 교정원(House of Correction) 등 다양한 유형의 감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교도소의 위생 상태가 훌륭하고 죄수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죄수들에게 침구와 생활용품이 완비되어 있고, 노동을 ‘학습’하게 하며, 식사와 산책 시간이 보장되어 신체와 정신 건강이 강화된다고 보았다. 특히 피아노 반주와 함께하는 예배 시간을 보고 “예악(禮樂)을 통해 훈도한다”라고 해석했는데, 예악 교화는 유가 덕정(德政)의 중요한 요소다. 실제로 영국 교도소 역시 종교의식을 통해 죄수를 교화하려 했으므로, 유석홍(劉錫鴻)이 유교적 관점에서 서양식 예배를 바라보았다 하더라도 그 본질적 의도는 영국 교도소의 교화 목적과 다르지 않았다.
[그림 2. 펜턴빌 교도소 예배당]
<출처> Henry Mayhew and John Binny, The Criminal Prisons of London, 1862, p.133.
중국인들의 영국 교도소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를 살펴보면 대부분 긍정적으로, ‘인의’(仁義), ‘인애의 마음’(仁愛之心), ‘예의범절’, ‘교화’, ‘교육’ 등의 표현이 주를 이룬다. 유석홍은 교도소에서 교육받고 교화된 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성과를 낼 수 있고 바르게 생활하기 때문에 런던의 백성들이 대체로 모두 평온하고 부지런하다고 보았다. 이는 실제로 영국의 교도소 개량을 이끈 존 하워드(John Howard)가 의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아가 몇몇 중국인은 청나라의 교도소 제도의 개선을 주장하거나 실제로 이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여, 청말신정 시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선구안을 보이기도 했다.
4. 부강의 희망, 초등교육
중국인들은 영국의 여러 학교를 방문했는데 특히 자선 학교를 많이 방문했으며, ‘교민’(敎民)과 ‘양민’(養民)의 관점에서 이를 해석하고 국가의 부강과 연결했다. 이는 실제로 당시 영국 초등교육이 지향하는 사상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영국 학교의 학생들은 정연하고 엄숙했으며 『예수경』을 낭독했다. 이는 기독교 ‘덕육’(德育)의 목적이 있었다. 자선가가 설립한 해군 학교를 방문한 중국인들은 인재 양성의 가능성에 감탄했고, 입스위치(Ipswich)에 위치한 자선 실업 학교를 방문한 유석홍은 “의숙(義塾)이 많으면 도둑이 적다”라는 현지 시장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장덕이(張德彝)와 설복성 또한 교육을 통해 백성의 지력을 향상해 각자 직업을 갖고 본분을 지키게 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영국에서 대중 초등교육은 교회 자선 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산업혁명과 도시화로 빈곤 아동이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은 상류 계급에게 게으르고 무지해 보였고, 일종의 악으로 비쳤다. 교회는 자선 학교를 곳곳에 설립하여 하층민 자녀를 경건한 기독교인이자 상류 계층에 충성하고 순종하는 시민으로, 근면한 노동자로 양성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1870년 「초등교육법」 이후에도 직업교육의 성격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청말 중국인들은 이러한 영국의 직업 교육을 부강의 핵심 요인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실상 영국의 자선 교육은 부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도시화에 따른 하층민 유랑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사회 통제의 성격이 강했다. 중국인들이 이에 공감했던 것은, 영국 교육에서 유교적 교민·양민의 이상을 발견했던 것과 동시에, 그것이 실제로 당시 영국 교육의 배경과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5. 인의(仁義)로 부강해지다, 영국의 자선
청말 중국인들은 영국에서 다양한 자선 모금 활동에 초청받아 참가했다. 이들이 주로 접한 모금 방식은 편지를 통한 모금과 현장 참여 모금으로, 후자는 자선 공연·다회·만찬회·무도회·바자회 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러한 방식에 크게 감명받지 못했다. 다회와 만찬회는 실내가 붐비고 답답한 데다 계단을 자주 오르내려야 했으며, 자선 무도회는 중국 전통문화와 맞지 않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선 바자회에서는 여성의 미모를 앞세워 물건을 판매하는 방식에 불쾌함을 느꼈는데, 이는 중국의 보수적 관념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당시 영국에서도 순수한 선의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바자회에 참가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림 3. 자선 바자회]
<출처> Punch, 4 Aug. 1888.
영국의 모금 방식을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중국인들이 계속 참석한 것은 영국에서의 사교 관계 유지라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영국의 자선 활동 자체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지지는 국제적 구제 활동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중국인들은 영국인들이 도움이 필요한 여러 나라의 요청에 기꺼이 응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북 대기근 당시 중국 역시 영국의 구제를 받았는데, 영국 현지에서도 중국을 위한 모금 활동이 전개되었다. 곽숭도(郭嵩燾)·증기택(曾紀澤)·유서분(劉瑞芬) 등의 공사들은 이를 “인의(仁義)의 행동”으로 높이 평가했다. 유석홍은 “오늘날 영국은 인의가 근본임을 알고, 이로써 부강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는데, 유교 사상에서 인의는 최고의 가치로, 그는 영국이 바로 이 덕목을 갖춤으로써 부강을 이루었다고 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중국인들의 인식과 유사하게, 당시 영국 중상층 역시 자선 활동이 도덕적 교화를 통해 사회를 개선하고 국익을 증진한다고 믿고 있었다. 다만 이는 구조적 문제를 간과한 인식으로, 실질적인 효과는 크지 않았다.
6. 정을 통하다(通情), 영국의 정치
장기간 영국에 주재했던 중국 관원들은 영국 입헌군주제의 주요 특징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영국의 부강이 군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그들이 군주와 정부, 민중 간의 관계를 관찰하면서 군주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지위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영국 군주의 형상이 유가 이상 속의 덕치 군주를 연상시키면서 군주가 국가 부강을 주도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한 영국 왕실 구성원들이 자선기관을 방문하여 격려하고, 각지를 순례하며 민중을 돌보는 모습을 ‘덕’(德)으로 정치를 시행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림 4. 빅토리아 여왕 즉위 50주년 기념 행렬]
<출처> The Illustrated London News, Saturday, 25 June 1887.
특히 오랜 기간 영국에 머물렀던 장덕이는 에드워드 7세 시대 왕후 알렉산드라의 자선 활동에 주목하며 그 자비로움이 생모(生母)와 같다고 찬탄했다. 이러한 이미지는 유교 정치사상의 인정(仁政)과 ‘위민부모(爲民父母)’ 관념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 유교에서 이상적으로 보는 군민 관계는 군주가 백성의 부모로 여겨지고, 백성은 군주의 자녀와 같아서 서로 의존하며 긴밀하게 단결하는 것이다. 다만 중국인들이 영국 군주를 민본적 군주로 인식한 것은 유교 사상의 투영만이 아니라, 실제 영국의 역사적 배경과도 맞닿아 있었다. 조지 3세 시대 이후 왕권이 약화하면서 정치가들은 군주 권력의 기반을 대중화된 가부장제 위에 구축하고자 했다. 군주의 활동은 신문을 통해 모성적 돌봄과 연결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변화한 영국 사회에서, 군주의 방문은 군주가 공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국가를 단결시키는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영국 군주를 ‘덕치군주’로, 의회를 보조적 기구로 이해하며 이를 ‘상하통정(上下通情)’의 방식이라 칭하고 찬사를 보냈다. 또한 영국 민중이 정치에 적극적 관심을 두고, 군주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사교 예절이 고도로 발달한 점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여 해석했다. 많은 중국인은 영국의 부강에 도덕적 기초가 있다고 보았으며, 보수적 인사인 유석홍조차 영국을 더 이상 야만의 나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7. 나가며
영국을 여행한 청말 중국인들이 영국 부강의 원인을 탐구할 때, 도덕적 사고는 늘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도덕이 영국의 부강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그래서인지 부강과 상관없는 곳에서도 부강을 읽어내곤 했다. 이들은 민본주의(民本主義)에 기반하여 사고했고, 중국은 이미 도덕이 상당히 완비되어 있으니 이를 충분히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도덕적 사고는 단순히 유가 도덕을 고수하려는 의식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의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박애주의의 유행, 도덕적 삶의 추구, 자선 활동의 확산, 하층민에 대한 교화, 군주의 부모적 역할 강조 등 당시 영국 사회의 사상적 배경은 중국의 인의(仁義) 및 민본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즉 중국인들이 영국을 관찰할 때, 중국과 서양의 도덕관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으며, 그들 중 일부는 양국의 도덕이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영국을 여행한 중국인들은 영국이 부강해진 이유가 유가 문화와 유사한 도덕을 실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중국 역시 자국의 도덕을 충분히 구현하면 된다고 여겼다. 이처럼 영국의 부강 경험을 학습하는 것과 유가 도덕을 유지하는 것은 이들에게 큰 사상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 글을 통해 동서양의 도덕 가치와 사회 규범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도 어딘가 통하는 지점이 있음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동서양의 상호 이해가 더욱 깊어지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1)이하는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富强與道德: 晚清旅英中國人的觀察與思考」(北京大學博士學位論文, 2025)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