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부산대학교 윤 욱
글_ 부산대학교 윤 욱
자고로 중국인으로서 서양에 가 본 여행객들은 적지 않았을 테지만 중국정부가 최초로 서양에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은 청말 중국이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비로소 등장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혹자는 중국이 파견한 공식사절로서 1868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미국공사 벌린게임에게 중국황제가 신임장을 주어 서양각국을 예방하게 한 벌린게임 사절단이나, 그보다 조금 앞서 존재했던 동문관 학생들로 구성된 서양 유람단이었던 삔춘 사절단을 중국이 최초로 서양에 파견한 사절단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보다 150여년 전인 1712년 황제의 국서를 휴대한 정식 사절단이 유럽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이 글에서 설명하려는 튤리션 사절단이다. 이 사절단이 향한 여행 목적지는 카스피해 북쪽 볼가강 유역에서 유목하고 있던 당시 러시아의 부용국이었던 톨구트부였다.
중국의 사절단이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는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무려 3년에 걸친 장기적인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내륙아시아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러시아인들은 모피 짐승들을 쫓아 동진하여 1640년대에는 흑룡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의 현주민들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과 갈등관계를 빚게 된다. 1652년 아찬스크 전투 이후 여러 차례 양국 간에 군사적인 충돌이 벌어졌지만 변경의 안정을 바라는 청과 중국과의 교역을 갈망하던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양국의 동부 국경이 안정되고 러시아는 정기적으로 북경에 대상을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유목하고 있던 몽골은 17세기 초에 이르면 흥안령산맥 이동에 자리잡은 차하르, 코르친 등 내칼카, 지금의 외몽고 지역의 외칼카, 그리고 알타이산 서쪽, 천산산맥 남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던 오이라트 4부 (준가르부, 톨구트부, 호쇼트부, 둘부트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이라트 4부 가운데 하나였던 톨구트부는 원래 현재 신장위구르 자치주 타청시 일대에서 유목하고 있었는데 인근 이리하 유역에 자리잡은 준가르부가 세력을 확장해가자 1628년 서천하여 볼가강 하류에 정착하게 된다. 툴리션 사절단이 파견되었던 강희말년에 이르면 톨구트부는 수장 아유키 칸의 지배 하에 인구와 가축이 늘어나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톨구트는 러시아의 행정구역인 아스트라한 성 옆에 위치하면서 러시아의 남쪽 울타리를 형성했다. 톨구트부는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대신에 러시아가 오스만제국, 스웨덴 등 이웃나라들과 전쟁을 벌이면 군대를 파견해 러시아를 도와야 했다.
톨구트부가 비록 지리상 유럽에 멀리 떨어져 존재해 있었지만 이전에 살던 고향과의 연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티벳불교를 신봉하던 톨구트부의 수장들과 달라이 라마 사이에는 빈번히 사절이 파견되었고 톨구트부의 왕공들은 일종의 보시와 같은 종교행사인 오차봉양 (熬茶奉養)을 하러 라사를 친히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1701년 아유키 칸의 아들이 준가르에 부중을 이끌고 도망갔는데, 준가르가 이 부중을 돌려주지 않자 양국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당시 티벳에 오차봉양 (熬茶奉養)을 하러 왔던 아유키 칸의 조카인 아랍주르 일행은 길이 끊겨 귀국하지 못했다. 1704년 아랍주르 일행이 청조에 도움을 요청하자 강희제는 아랍주르를 고산패자 (固山貝子)에 봉하고 가곡관 밖에 이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 후 5년이 지나서 아유키 칸이 강희제의 조정에 사절을 보내왔는데 이것이 튤리션 사절단이 파견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많은 학자들은 아유키 칸이 사자를 보내온 원인이 아랍주르의 소환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당시 아유키 칸이 사자에게 휴대하게 하여 강희제에게 보낸 글의 내용으로 추정컨대 청 조정에 사절을 파견한 주요 원인은 준가르를 거쳐 티벳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중국을 통해 티벳으로 갈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유키 칸에게는 달라이 라마가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는 재위 동안 다섯 차례나 달라이 라마에게 사절을 파견했었고, 달라이 라마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1690년 그에게 칸의 봉호와 인장을 내린 바 있었다. 따라서 티벳과 연락을 유지할 새로운 통로를 확보하는 것은 아유키 칸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아유키 칸의 사자를 접견한 후 강희제는 답방하는 사절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는데, 강희제가 사절을 보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문제는 거의 이백 년 동안 논쟁이 되고 있다. 아랍주르의 송환을 상의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 양국 사이에 있는 준가르의 협공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 특히 1771년 아유키 칸의 손자 우바시가 톨구트부를 이끌고 원래 유목지로 회귀한 것과 연관지어 아유키 칸에게 동천하도록 회유하기 위한 것이라는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된 바 있었다.
이 문제에 접근할 때 강희제가 사절단에게 내린 당부를 담은 유지가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지의 대부분은 러시아인과 마주쳤을 때, 러시아의 짜르를 접견할 기회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등 러시아와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강희제는 이 유지에서 아유키 칸이 준가르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면 단호히 거부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강희제가 뜬금없이 이런 지시를 내렸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아유키 칸의 사자들이 구두로 이러한 제의를 했을 것이다. 당시 청도 티벳, 변경민의 탈주 등의 문제로 준가르와 계속 충돌하고 있었으므로 비록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톨구트부와의 군사적 제휴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강희제는 톨구트부와 유대를 강화하고, 톨구트부의 의도와 상황을 파악하고, 여행 도중에 러시아인들의 생활, 지리 등을 염탐하려는 목적 등을 갖고 사절을 파견했다고 할 수 있다.
사절단은 시종무관, 노복, 아랍주르의 부하들까지 포함하여 32인으로 구성되었는데, 관품이 가장 높았던 세 사람은 인차나, 나안, 툴리션이었다. 비록 이 사절단이 나중에 종종 “툴리션 사절단”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절단의 수장은 인차나였다. 그는 사절단 가운데 나이나 관품이 가장 높았을 뿐만 아니라 칼카와 준가르부에 사신으로 파견된 바 있었고, 오랫동안 내각에서 몽골, 러시아 관련 문서를 처리하는데 종사했던 인물로서 청 조정 내에서 가장 러시아 사정에 밝은 사람에 속했다.
사절단은 1712년 6월 23일 북경을 출발하여 장자코우를 거쳐 몽골초원으로 진입했다. (그림1 참조) 8월 24일경 러시아의 셀렌긴스크에 도착하여 셀렝가강 남안에 머물면서 약 반년간 피터대제의 승인을 기다렸다. 당시 러시아가 툴리션 사절단에게 가도(假道)를 허락한 것은 러시아의 종주권을 승인하지 않는 준가르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절단은 이듬해 2월 다시 여행을 시작하여 8월에는 토볼스크에 도착하여 시베리아성 성장 가가린의 영접을 받고, 12월에는 카잔에 도착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1714년 1월 2일에는 사라토프에 도착해 아유키 칸의 영접을 기다렸다. 5월 18일 접반사를 만나 다시 여행을 시작하여 7월 12일 아유키 칸의 게르가 있는 현재의 볼가 지역에 도착했다. 인차나는 아유키 칸을 만나 강희제의 칙서를 바치고 아유키 칸의 두 다리를 감싸안고 아유키 칸이 오른손을 인차나의 어깨에 놓고 위로하는 포견례라는 방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강희제의 칙서는 조공 사절을 보내온 것을 칭찬하고 상을 내리며, 아랍주르의 송환을 준비 중이었는데 사절이 도착하여 인차나 일행을 파견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아유키 칸과 왕비, 왕자 등 톨구트부의 지도부는 의장대와 대포, 악대와 보드카, 포도주, 술잔 등 기물들을 러시아에서 빌려와 돌아가며 연회를 베풀며 성대하게 인차나 일행을 대접했다. 도착한지 열흘 째 되는 날 아유키 칸이 배푼 두 번째 연회에서 아유키 칸은 비로소 아랍주르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송환은 강희제의 결정에 맡긴다고 했다. 아랍주르의 송환은 그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절단은 14일간 아유키 칸의 숙영지에 머물다가 7월 25일 다시 귀로에 올랐다. 귀국하는 길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여정이었다. 토볼스크에서 재차 시베리아 성장 가가린을 만난 후 나안과 툴리션은 소식을 신속히 전하기 위해 먼저 출발하고 인차나는 나머지 구성원을 이끌고 뒤쫓아왔다. 인차나 일행이 북경에 도착한 날은 1715년 6월 28일로 삼년을 채우고 닷새가 더 걸린 여정이었다.
<그림1> 툴리션 사절단의 경로 [설명] 붉은 실선이 사절단 일행이 왕복한 경로이고, 불연속선은 돌아오는 길에 나안과 툴리션이 본대에서 떨어져나와 먼저 입국하기 위해 지났던 곳이다.
기타 부분은 본대의 노정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귀국 후 인차나, 나안, 툴리션은 계속 내각에서 몽고, 러시아 관련 문서를 처리하는 등 러시아와 관련된 업무를 이어갔다. 사절단의 수장이었던 인차나는 이번 사행이 그의 경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절단을 따라갔던 아랍주르의 부하들이 그만 톨구트부에서 도망을 가버렸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고 돌아와서도 승진하지 못했다. 계속 내각시독학사로 근무하다가 강희제 말년에는 준가르 원정군에 종군하여 변방에서 풍찬노숙했다. 옹정제가 등극하자마자 노쇠와 병환을 이유로 사직했다.
사행단원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툴리션이었다. 그는 귀국한 후 원래 내각시독에서 병부원외랑, 얼마후에는 병부낭중으로 특진하고 누차 내정(內廷)에서 입직했다. 강희제는 사절단의 출발에 즈음하여 “러시아의 백성과 그들의 생활방식, 러시아의 지리에 특히 주목하라”고 주문한 바 있었다. 귀국한 이듬해인 1716년 툴리션은 출사 도중에 견문한 바를 자세히 기록한 『이역록(異域錄)』을 작성해 올리게 된다. 강희제는 툴리션을 매우 신임했다. 러시아에 황제의 칙서를 전달하기 위해, 또는 러시아에서 파견하는 대상, 외교관, 의사 등을 맞이하고 돌려보내기 위해 빈번히 툴리션을 러시아의 국경도시인 셀렌긴스크로 파견했다. 옹정제가 등극한 후에도 툴리션의 관운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툴리션은 광동포정사를 거쳐 옹정4년에는 서안순무에 발탁되었다. 1726년 러청 양국의 현안을 토론하기 위해 러시아 전권사절이 북경에 도착하기에 앞서 옹정제는 러시아 사정에 밝은 툴리션을 병부우시랑에 임명해 북경으로 불러들였다. 그후 체결된 카흐타 조약을 통해 외몽골과 시베리아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러시아는 북경에 수도사와 학생을 파견하고 이들을 수용할 건물(아라사관)을 설치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조약 체결에 참여했던 청측 대표 가운데 툴리션은 러시아 사정에 가장 밝은 인물이었지만, 옹정제가 그의 의견을 존중하지는 않았다. 조약 협상에서 청측 대표였던 처링이 옹정제에게 러시아 전권대사와 변계 문제를 토론한 정황을 주접으로 올리자, 옹정제는 “툴리션은 성정이 조급하니 매사에 네가 잘 살피고 부화뇌동하지 말라”라고 주의를 주었다. 조약이 체결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군대를 배열하고 총포를 쏘고 러시아 사절과 하늘에 고두한 것을 두고는 “이렇게 하고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니 실로 낮가죽이 지나치게 두껍다.”라고 책망하기까지 했다. 결국 툴리션은 옹정6년 혁직당하고 말았다. 툴리션이 옹정제의 눈 밖에 난 것은 옹정제가 그를 옌신의 당파로 분류했기 때문일 것이다. 종실이자 서안장군이었던 옌신은 옹정제가 잠저시절에 황위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던 황자들과 결당했을 뿐만 아니라 옹정제의 등극에 큰 공을 세웠지만 이를 계기로 권력을 휘둘렀다가 사사당하는 녠겅야오를 두둔했다가 제거된 인물이다. 툴리션은 서안순무로 있었을 때 같은 성에서 근무하던 옌신에게 군사기밀을 넘겨준 적이 있었다.
툴리션이 톨구트부로의 여행과 빈번한 러시아 국경 도시의 방문, 양국을 오가는 러시아 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쌓아올린 러시아 경험은 정치적인 문제로 그가 제거됨에 따라 더 이상 조정에서 빛을 발할 수 없었지만, 그가 지은 『異域錄』은 청대 사인들에게 이제까지 목도하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러시아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툴리션은 이 책에서 셀렌긴스크에서 볼가까지 여행 중 지났던 곳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일행은 육로만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에 산재한 강을 이용해 여행했었는데, 툴리션은 경유했던 셀렝가강, 앙가라강, 예니세이강 , 오브강, 볼가강 등의 발원지, 물의 색깔, 지류, 물살의 속도 등에 대해서도 낱낱이 기술하고 있다. 툴리션은 연도의 도시, 촌락, 민족, 주둔하는 병사의 숫자와 인구 및 생활, 통과한 지역의 동식물의 분포에 대해서도 주목할만한 정보를 남겨놓고 있다. 그는 더나아가 자신의 노정을 시각화하기 위해 자신이 방문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북유라시아 대륙의 지도를 작성하여 첨부하기도 했다. (그림2)
『異域錄』은 러시아에 관해 저자가 목도한, 다른 책이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으므로 청대에도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옹정연간에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으며, 나중에는 사고전서를 비롯한 다양한 총서에 수록되었다. 『異域錄』은 만문본과 한문본이 모두 존재하는데 만문본이 한문본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아 만문본으로 한문본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다. 만문본은 현재도 만문을 배우는 학생들을 위한 교재로 종종 사용할만큼 훌륭한 문학작품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이 사절단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異域錄』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비록 툴리션이 이 사절단의 수장은 아니었지만, 통상 이 사절단을 “툴리션 사절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최근 인차나의 출사 보고를 담은 만문 주접이 당안 정리 중 발견되었는데 『異域錄』에 비한다면 분량도 적고 주로 지명과 통과한 시점을 무미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림2> 툴리션이 자작해서 이역록에 수록한 북유라시아 만문 지도.
[설명] 이 지도의 우하귀의 직사각형이 ging hecen, 즉 북경이고, 좌상귀의 직사각형이 moskowa hoton, 즉 모스크바를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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