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중국절강해양대학 중문과 연광석
글_ 중국절강해양대학 중문과 연광석
우리에게 대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이 조금 더 본격적으로 제기될 시점이 된 듯하다. 특히, 탈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재권역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동아시아에서도 잠재된 갈등이 다시 점화되면서 우리의 정치와 학술 영역 모두에서 대만이 자주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만이 언급될수록, 대만은 나에게 점점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곤혹’이 되는 듯하다. 단순히 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만을 바라보는 나와 우리 전체의 문제라는, 문제의 크기와 심각성 때문이다.
먼저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이 포문을 열었다. 그는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대만 문제에 대해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대해 절대 반대한다”며 “단순히 중국과 대만만의 문제가 아니고 남북한 간의 문제처럼 역내를 넘어서서 전 세계적인 문제”라고 발언했다.(경향신문, 2023년 4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의 대만인식을 잘 보여주는 발언인데, 이는 ‘중국’을 하나의 ‘위협’으로 설정하고, 이러한 위협의 잠재적 피해자로 대만을 인식한다.
한편, 지난 총선 기간 야당 대표인 이재명도 대만에 대해 언급해서 세간의 주목을 끈 바 있다. 그는 “중국에 셰셰, 대만에 셰셰하면 되지, 왜 중국에 집적거리느냐”며 “왜 우리가 양안 문제에 개입하느냐. 대만 해협이 어떻게 되든, 중국과 대만 국내 문제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발언했다.(서울신문, 2024년 3월 27일) 이와 같은 이재명 대표의 발언은 국내에서 보수 진영으로부터 ‘중국에의 굴종’이라는 평가가 나왔고, 중국 측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이러한 발언은 굴종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용적 태도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평화와 공존의 기치하에 국제적 설득과 관계국의 참여를 통하지 않고는 한반도의 문제를 풀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감안한다면, 동아시아의 타자에 대해 ‘이익’ 차원에서의 실용적인 접근이 갖는 한계는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치권의 한계는 어쩌면 학술계, 특히 ‘중국 연구’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대만 무력통일 위협 그리고 북한의 핵도발이라는 위기들이 연동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백승욱, 『연결된 위기』)와 같은 관점이 그렇다. 이는 대국, 강국 또는 (준) 헤게모니 국가를 중심으로 역사 전개의 동력을 파악하는 경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데, 복잡한 논의구조 안에서 대만은 위협을 당하는 위치에 놓여질 뿐,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의 관계 동학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결국 이 담론구조에서 대만은 반응적(responsive)이고 수동적인 객체로만 간주된다.
‘가치동맹’의 기치 아래 미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비주체적 관점, 우리 내부의 모순과 매개됨 없이 ‘국익’만을 추구하는 실용적인 관점, (준) 헤게모니 국가를 중심으로 역사의 전개를 해석하는 ‘현실주의’적 관점은 모두 대만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이와 같은 관점들의 인식구조 안에서 대만은 공히 ‘방법’이 아닌 ‘목적’, 또는 ‘목적’의 부산물이다.
여기에서 일본의 사상가 다케우치 요시미에 의해 ‘방법으로서의 아시아’가 제시되면서, ‘방법’과 ‘목적’을 대별하는 하나의 대안적 화법을 우리가 얻게 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목적’으로서 타자를 대하는 인식론은 제국-식민주의의 일원론을 내재화한 것이라는 점도 다시 확인한다. 게다가 전후 국민국가화로 표현된 신식민지화 시기를 고려하면, 제국-식민주의자의 목적론을 훌륭히 학습한 피식민지 지식작업자들이 이와 같은 인식론을 다시 타자에게 투영하면서 구 식민자에 의해 자유 세계의 우수한 일원이 되었음을 인정받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다케우치 요시미(‘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미조구치 유조(‘방법으로서의 중국’), 진광흥(陳光興, ‘아시아를 방법으로’)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비판적 화법의 계보를 접하기 전에 초보적으로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졌었다. 2009년 즈음 세계체계분석과 같은 보편-특수적 분석틀을 활용해 한국과 대만의 이주노동자운동을 비교하는 석사논문을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나의 이론틀이 갖는 한계를 모호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논문의 과정과 결론을 방어해야 하는 자기 모순적 처지에 있었다. 그때 느꼈던 마음의 ‘불편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당시 이주와 노동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여러 이론, 사례, 학설 등을 검토했는데, 이론은 기본적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주어지고, 대만과 한국 및 여타 제3세계는 그 적용 사례일 뿐이었다. 게다가 나의 논의 안에서 구미적 기원을 갖는 이론 학습의 우등생으로서 한국은 무의식적으로 대만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그런 계서화된 세계 안에서 꼴등 언저리에 위치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훗날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제국-식민주의적’ 인식틀로 타자를 보는 나는 정말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까?” 결국 ‘사람’이 포함되는 인문사회 담론에서 문화의 다원평등한 성격을 고려한다면, 수직적으로 서열화된 체계를 깨는 인식론적 전환이 불가결하고 아울러 긴급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식민-제국주의적 지식에 의해 존재를 부정당하는 서발턴의 목소리를 복원하고자 한 탈식민주의의 기본적 문제의식 또한 같은 맥락에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으로 인해 훗날 다케우치 요시미의 글을 만났을 때 그토록 반가웠던 것이다. 그는 1960년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자만이 아니라 보통의 국민들도 그랬습니다. 정치가도 경제계 인사도 모두 그런 식이어서, 정치제도는 영국이 어떻고 예술은 프랑스가 어떻고 하며 곧잘 비교하곤 했지요. 그런 단순한 비교로는 안 됩니다. 자기 위치를 확실히 파악하려면 충분치 않습니다. 적어도 중국이나 인도처럼 일본과 다른 길을 간 유형을 끌어다가 세 개의 좌표축을 세워야겠구나.(다케우치 요시미(2011[1960]),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2: 내재하는 아시아』, 47쪽)
그런데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문제의식은 유럽중심주의적 타자인식의 문제를 전면화한다는 점으로 인해 타자 인식의 윤리를 적확히 문제화하지만, 상대적으로 그것과 사회 내부의 모순과의 관계는 다소 소홀히 다루어진 측면이 없지 않다. 물론 다케우치 요시미, 미조구치 유조의 저작을 조금만 세심히 읽어보면, 그들 모두 궁극적으로 일본의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으로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방법으로서의 중국’을 제시한 것이었음은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훗날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와 서발턴 연구가 명시적으로 직접 결합된다. 바로 대만의 탈식민주의자 진광흥에 의해 양자가 유기적 결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진광흥은 1990년대 중반에 이미 프란츠 파농에서 스튜어트 홀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적 문화연구의 계보와 다케우치 요시미에서 미조구치 유조로 이어지는 일본의 탈식민주의 계보를 결합시키고, 연속된 결과물들을 모아 2000년대 초중반 『탈제국: 아시아를 방법으로』(De-imperialism: Asia as method)를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등 여러 언어로 출간하면서 ‘방법으로서’라는 수식어가 일종의 학술적 유행어로 재탄생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한국어판 『제국의 눈』은 가장 먼저 출간된 단행본이지만, 지면 제한으로 일부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여기에서 ‘탈제국’이 대내적으로 피식민 대중의 정신분석적 차원으로서 문화정체성의 문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다면, ‘아시아를 방법으로’는 이와 같은 접근에 주체성의 토양을 부여해주는 ‘권역’적 참조지평을 의미한다. 특히, 진광흥은 남아시아의 서발턴연구를 참조하면서 ‘혼종성’에 대한 비판적 견지에서 ‘비판적 혼합’이라는 개념을 통해 ‘타자 되기’의 윤리를 실천하자고 제안한다. 혼종성이 ‘다문화주의’와 같이 주어진 불변하는 기준(‘순종’)에 견주어 분류된 타자들을 동정적이고 시혜적으로 ‘타자화’한다면, 비판적 혼합은 ‘여성, 원주민, 동성애자, 양성애자, 동물, 거지, 흑인, 제3세계, 아프리카’를 마주하여 ‘타자 되기’를 통해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는 식민주의적 일원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역동적 ‘주체화’를 의미한다. 이는 식민주의의 일원성에 의해 억압된 서발턴의 주체성을 발굴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동시에 ‘아시아를 방법으로’라는 다원적 참조체계의 생성을 결합한다. 왜냐하면, 구미에 편향된 참조체계로는 ‘타자 되기’ 또한 인식론적 제약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보편적 ‘시민사회’를 넘어 제시된 남아시아 출신 탈식민주의자 파타 차터지(Partha Chatterjee, 1947~)의 ‘정치사회’ 개념이 그에 의해 적극적으로 참조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서발턴 연구’가 갖는 사회 내부의 다원적 주체를 부정하는 식민성에 대한 비판과 ‘아시아를 방법으로’가 갖는 타자 인식에서 계서적 인식의 식민성에 대한 비판은 상호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회 내부의 다원성과 복잡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국에는 ‘다문화주의’와 같이 ‘순종’을 전제한 혼종성 논리로 전락했던 경험들을 반추하며, ‘아시아를 방법으로’라는 타자인식에서의 관계론적 전환이 더욱 절실함을 재확인한다. 특히, ‘국제화’가 강조되면서도 실질적인 ‘관계’ 형성에 반복해서 실패한 경험들을 성찰하는 데에도 미조구치 유조의 다음과 같은 자기성찰은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결국 우리 일본과 중국의 주체는 서로를 하나의 객체로서 인식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의 객체성을 객관화할 수 없는, 자기일원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은 소위 국제적인 교류를 갖지 못한, 안을 향한 독선적인 주체였다.(미조구치 유조(2016[1980-1981]), 「‘중국의 근대’를 보는 시각」, 『방법으로서의 중국』, 35쪽)
이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미국 또는 유럽이라는 매개가 무의식처럼 내부에 구조화되어 있는 ‘국제화’의 자폐성이라는 역설을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구조가 갖는 위력을 감안할 때, 이러한 성찰의 출발점은 아시아 안에서 부단한 직접적 대면을 통해, 기존의 익숙한 보편-특수적 인식틀로 서로를 인식할 때 문득 들었던 불편한 느낌, ‘타자’를 배려하지 못해서 드는 불편하면서도 소중한 그 느낌을 각별히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느낌이 바로 아시아가 목적이 아닌 방법이 되는 출발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료: 나무위키
이제 탈식민주의에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와 ‘서발턴 연구’가 결합되었던 맥락에 대한 개설에 이어, 구체적으로 ‘목적’으로서의 대만에서 ‘방법’으로서의 대만으로 전환하기 위한 비판적 시좌를 설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동북아시아를 권역으로 설정할 때, 한반도와 한국의 경험은 식민과 신식민의 경험에서 차별화된다. 일본은 제국주의 세력이었고, 청조 및 그 이후의 중국은 반식민지 경험을 했으며, 조선과 함께 식민 경험을 한 대만, 홍콩, 마카오는 조선과 달리 반식민지 모국이 존재한, 즉 할양된 식민지였다. 조선과 남한의 식민 관련 경험은 ‘국가성’의 절대적 결여로 인해 사회 내부에서는 민중의 상호부조 문화를 형성하고, 대외적으로 피억압민족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성원으로 표현되어 왔다. 대만에 대한 한국인 다수의 일차적인 감정은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동정론적 인식의 배후에는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현실적 감정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인식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만약 현실의 대만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고, 그 안에 복잡다단한 역사사회적 모순이 작동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배/피지배 구조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면, 다시 말해서, 대만 사회의 지배/피지배 구조 안에서 상층 및 주류 세력이 구사하는 핵심적인 동일성의 정치 기제가 바로 ‘대만인’을 피억압민족으로 설정하는 반중론(反中論)이고, 이 구조에서 사회로서의 대만이 갖는 모순이 은폐된다는 점이 설명된다면, 대만과 서발턴에 대한 우리의 논의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한국에서의 대만 인식을 풍부히 하는 데 양안관계에 관련된 근래 중국에서의 경험을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사례는 중국 대륙에서 보는 ‘대만인’에 관한 것이다. 2023년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고 양안 문화교류가 재개된 시점이기도 했다. ‘통일전선’ 논리에 따라 중국 대륙 각지에서 독립분리주의자를 제외한 대만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초청한 행사가 개최되었고, 우연한 기회로 나는 복건성의 복주(福州)에서 열린 수백 명 규모의 학술행사에 초청 받아 참석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주최 측의 기대와 달리 공식 행사 시작 전날 만찬에서부터 초대 받은 대만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주최 측 고위급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했던 “대만인들은 ‘단합’하지 않는다”는 불평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 불평이 좀 의아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 ‘대만인’ 안에는 국민당의 후손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백색테러를 당한 대만 좌익의 후손도 포함되어 있었고, 아마 대다수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만의 복잡성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단합’의 어려움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중국 대륙에서 보는 대만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1970년대 말 대만의 향토문학논쟁 중에 국민당 우익을 대변했던 작가 여광중(余光中)이라는 사람이 있다. 중국에 와서 보니 그는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로 인정받아 그의 작품이 초중등 교과서에 수록되고 있었다. 향토문학논쟁 당시 여광중은 홍콩에서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글로 7년의 수감 끝에 갓 출옥한 진영진(陳映眞) 등으로 대표되는 향토문학진영을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했는데, 이와 관련한 중국 대륙에서의 여러 논의를 참조해보니, 여광중의 이러한 반공주의적 행위가 문혁의 극좌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류 담론에 의해 포용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광중은 문혁의 광기를 홍콩에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극좌적 노선을 경계했기 때문에, 대만의 ‘리얼리즘’ 작가에 대한 반공주의적 비판은 비록 지나친 점이 있더라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실 사회의 역동성은 그 내적 모순에 근거하는데, 이와 같은 내적 모순은 사회성격적 함의를 통해 설명된다. 사회성격은 본래적으로 사회의 불완전성 또는 비자족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만의 사회성격에 대한 해명은 대만을 본질주의적 실체로 전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복잡한 관계들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이를 간명히 표현하면, ‘역사적 중국을 포함하며 현실적 중국을 넘어서는 대만’이라고 할 수 있다. 역동적 대만의 주체성은 자기 안에 과거의 중국을 온전히 포함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미래를 현재의 중국 안에 가두지 않는다. 이 구도에서 우리는 반중론과 친중론, 또는 독립론과 통일론과 같은 소모적 대립을 일거에 극복한다. 대비해서 보면, 사회성격을 고려하지 않는 대만 인식, 즉 ‘국민국가’적 인식은 대만을 역사 없는 순수한 공백의 땅으로 설정하거나 혼종성을 강조하며 모순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고, 동시에 그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전가하는 경향도 있다. 이는 대만에 대한 ‘동정’적인 인식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사실 대만의 미래를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설명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대만 인식, 그리고 중국의 대만 인식 모두 사실상 ‘중국론’의 아류 또는 반복에 그치는 듯하다. 즉, 대만의 사회주체성을 부정하는 논리다.
비록 대만의 국체인 중화민국이 국제법적으로 국가성을 부정당하고 있지만, 우리의 대만 인식에는 기본적으로 전후 형성된 국민국가적 인식틀이 적용되고 있다. 이는 ‘국민국가’라는 근대의 지표를 시간성의 보편적 축으로 삼아 그 전후의 역사를 보편적 역사지식으로 재구성한다. 이를 통해서 세계사 속의 개별 민족/사회사는 하나의 원리 밑에 통합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개별 민족/사회사의 다원적 주체성은 억압되었다. 남아시아의 탈식민주의 연구그룹에서 비롯된 서발턴 연구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바로 이와 같은 인식론적 틀에서 배제되거나 억압된 주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법으로서의 대만’은 대만을 목적론적 대상으로 타자화하지 않고, 동태적인 관계적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승인하려는 인식론적인 문제의식이다. 대만을 정태적이고 목적론적 대상으로 삼는 지역학적 인식론은 표면적으로는 대만의 주체성을 승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동태적인 주체성의 근거가 되는 사회성격적 모순을 부인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역사로부터 단절된 순수한 주체성(이로부터 잡종/혼종이 연역됨)으로서의 ‘대만적인 것’과 함께, 현존하는 실체로서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한 피억압 민족 주체로서 사회성격적 내부 모순이 은폐된 일괴암적인 민족으로서 ‘대만인’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집약한 ‘방법으로서의 대만’은 여전히 선언적 의미에 머무르기 쉽다. ‘방법으로서의 대만’에서 ‘대만을 방법으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즉 ‘대만’의 주체성을 승인하는 구체적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된 ‘타자 되기’를 권역 내 관계론적 차원에 적용하는 적극적인 시도가 요구된다. 즉, 타자 되기가 기본적으로 내재화된 식민주의적 정체성을 문제화하는 자기 비판적인 역동적 주체화 과정이듯이, ‘대만을 방법으로’ 삼는 한국은 ‘한국’이라는 주체 자체를 ‘정상 주체’로 전제하여 본질화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손’과 ‘한계’로부터 출발하여 대만을 자신의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로 삼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식민주의적 보편성의 변용이라 할 수 있는 가상적 정상성들, 즉 국민국가화(유엔가입), 민주화(87체제), 자본주의화(OECD가입) 등을 상대화하고, 그 가상성을 직시하는 노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동서대학교 중국연구센터
우) 47011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로47 동서대학교 국제협력관 8층 TEL : 051)320-2950~2
Copyright © 2018 webzine.dsuchina.kr All Rights Reserved. Design By S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