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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신안선과 동아시아 해양 문명 교류

글_ 부산대학교 조 원

1. 14세기 신안선과 동아시아 해상 무역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낚시를 하던 어부들이 푸른빛 도자기와 파편들을 건져 올렸다. 장기간의 수중 발굴을 통해 700년간 서해안에 잠들어 있던 선박과 도자기 파편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선박은 중국의 주요 도요지에서 생산된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뿐 아니라 고려 청자,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자단목(紫丹木), 동전, 금속품, 나막신, 향신료 등을 적재하고 있었다. 인양된 유물의 수는 대략 2만 4천여 점에 달하며, 그 가운데 90%가 도자기이고 800만 개에 달하는 동전 또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사 결과 이 선박이 700년 전 몽골 통치하의 중국의 경원(慶元)(지금의 寧波)에서 출항했으며, 최종 목적지가 일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일본 교토의 선종 사찰 도후쿠지(東福寺)에서 당시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산 고급 목재인 자단목을 주문했던 것이다. 선박에 도자기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산 목재, 인도산 후추, 고려 청자 등을 싣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안선은 13-14세기 동아시아의 글로벌한 교역의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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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후쿠지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선종 사찰로 구조 미치이에가 1236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235년 송으로 건너가 경산사(俓山寺)에서 입문하여 인가를 얻고 1241년에 귀국한 승려 엔니를 초빙하여 도후쿠지의 초대 주지로 삼았다. 도후쿠지가 천태·진언·선종의 삼종을 겸하여 배우는 사원으로서 규모를 갖춘 것은 1273년이었다. 1319년 2월에 발생한 대화재로 가람이 전소되고 높이 5장(丈)의 석가여래상이 소실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중국에 자단목을 주문했다.  신안선에서 인양된 목재에 나타난 ‘도후쿠지’와 ‘10관 공용’이라는 글자를 통해 이 배가 소실된 도후쿠지의 재건을 명목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승인한 원과의 무역선이었음이 밝혀졌다. 사찰의 일부 건출물이 재건되었다가 1334년, 1336년 두 차례의 병화로 방장과 불전이 소실되었지만, 이후로 다시 재건되다. 신안선의 난파로 목재가 공급되지 못했지만, 다른 무역선을 통해 목재가 조달되었을 가능성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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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몽골의 일본 원정과 교류

  13-14세기 몽골은 세계 정복 전쟁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에 몽골 중심의 지배 질서를 구축했음을 잘 알겨져 있다. 쿠빌라이는 중국 전역을 정치·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이를 발판으로 해상으로 진출하여 동아시아 전역을 몽골의 영향권 하에 두고자 했다. 10세기 이래로 고려와 일본은 각각 송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통교의 한 축을 형성했다. 13세기 몽골이 금을 정복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한 이후에도 남송을 중심으로 고려, 일본 간의 상선 왕래가 활발했으며 전시체제 하에서도 경제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몽골은 남송 전쟁을 앞두고 남송의 우호 세력이었던 일본과 화친을 맺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으나 국서가 전달되지 못했고, 1268년에 몽골의 국서를 전달했으나 답서를 받지는 못했다. 당시 쿠빌라이의 국서를 받은 일본 조정에서는 복속을 요구한 내용에 대해 심각한 위기로 간주하고 충격에 휩싸여 방어태세로 돌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쿠빌라이는 사신을 재차 파견하여 일본과의 교섭을 시도했으나 일본측의 거부로 대마도에서 일본 본토로 들어가지 못했다. 

  1273년 남송 최전방의 방어 요충지인 양양(襄陽)이 몽골에 함락되고 같은 해 삼별초의 항쟁이 종식되면서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자 쿠빌라이는 일본에 마지막으로 조양필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일본으로부터 어떠한 답을 얻지 못했다. 쿠빌라이가 전시에도 고려, 일본, 남송 간의 선박 왕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대해 고려왕 원종에게 힐문했다는 사실을 통해 몽골이 세 나라의 연대를 상당히 경계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몽골은 일본 원정을 결의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과의 두 차례 전쟁에서 몽골의 패배는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있다. 몽골은 일본과 전쟁을 했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해상으로 진출해 안남, 자바 등의 해상 정권과 전쟁을 감행했다.

  동남아시아의 해상 세력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이 패배하기도 했지만, 몽골의 동남 연해 강국과의 전쟁을 목도한 소국들이 몽골 군사적 위협을 인지하고 자발적으로 투항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그 결과 14세기 초 전쟁이 종식되면서 몽골은 140여 개에 달하는 해상 정권들과 교류하는 해상 교류의 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몽골 원정군을 막아냈던 안남, 참파, 자바도 전쟁 이후 몽골과 화친을 재개했다. 몽골에 의해 육상∙해상 교역로가 열리고 해상을 중심으로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그렇다면 몽골과 일본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몽골과 일본의 정치적 교섭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양국간의 무역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의 하카다 유적지에서 1310년대 발행된 원의 동전 대원통보(大元通寶)가 발견되었고, 일본과 몽골 간에 이루어진 은의 유통을 드러내는 유물들 또한 남아 있다.  이 유물들은 무역선의 도래 빈도 규제, 동전 유통 금지 등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일본 원정 이후에도 지속적인 경제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증명해주고 있다. 실제로 원의 회화, 도자기, 차문화 등이 일본에 수용되었다. 한편 이 시기는 일본학계에서 ‘도래승의 세기’라고 불릴 정도로 승려들을 통한 지적, 문화적 교류도 이루어졌다. 일본은 몽골에 복속하여 정치적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14세기 몽골이 구축해 놓은 유라시아 경제 질서의 변경에서 그 수혜를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世界貨幣博物館協會

3. 14세기 왕대연(汪大淵)의 세계 여행과 동아시아인들의 세계 인식의 변화

  상인이자 여행가였던 왕대연(汪大淵)은 원 문종 연간에 천주(泉州)에서 상선을 타고 출발하여, 점성(占城), 자바, 수마트라, 인도, 아라비아를 거쳐 북 아프리아 모로코, 소말리아에까지 이르렀으며 2년만에 천주로 돌아왔고 『도이지략(島夷志略)』을 집필했다. 왕대연이 당시의 해상 교역로를 통해 방문하고 교역했던 나라의 수가 140여개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세계 교역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이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13-14세기는 근대 세계무역 체제에 비견될 정도로 중국, 이슬람, 유럽 지역을 망라하는 유라시아 교역권이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 동아시아의 정권들도 국제적 무역망에 포함되어 서방의 문화와 접촉했고 당시 원을 통해 동아시아의 교역 상품과 문화가 서방에 전달되기도 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대도(大都, 오늘날 베이징)를 몽골제국의 중심부로 삼아 지역의 육상 교역과 해상 교역루트를 장악하여 국제적인 교역망을 구축하고자 했다. 쿠빌라이는 남송을 병합한 이후 송이 동남 연해를 중심으로 형성했던 시박 무역 시스템을 흡수하여 해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원 조정에서는 외래 상인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관세를 합리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가령, 지원(至元) 17년(1280) 조치에 따르면, 외국 상인들은 천주, 복주 지역에서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팔고, 그 지역 토산물을 구입한 후, 상해로 이동해 토산물을 중국인들에게 다시 판매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원 정부는 그들에게 외국상품의 과세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토산물에 대한 과세 기준을 적용하기도 했다.

  14세기 고려에서 한어 교재로서 발간한『노걸대(老乞大)』에는 고려 상인이 고려를 떠나 원 대도에 이르는 여정과 교역을 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소개된 루트를 보면 고려 상인들은 육로로 대도에 갔다가 해로를 통해 귀국했다. 이 사실을 통해 고려-원 교역이 육∙해로에서 모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290년대 중반 들어 고려-몽골 간의 교역이 본격화되었다. 이 자료에 나타난 교역품들을 살펴보면, 원에서는 고려 모시의 수요가 높았던 반면, 고려상인들은 원으로부터 능자, 견자, 면자 등의 직조품, 서적, 장신구, 생활용구, 약재, 화장품, 빗, 장신구 등 다양한 물자들을 수입하였다. 이러한 민간차원의 교류 이외에도, 원과 고려정부 간의 관무역이 이루어졌다. 고려에서는 금속, 방직품, 동물, 약재, 모피, 해산물, 종이 등을 조공 물품으로 원 황실에 진공했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인삼과 같은 약재와 고려 종이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처럼 몽골의 적극적인 상업주의 정책으로 아라비아, 인도를 비롯한 동남 연해 나라들로부터 중국을 거쳐 고려, 일본에 이르는 국제적인 교역망이 형성되었으며, 고려 역시 원제국과 인적, 물적, 사상적 차원의 밀도 있는 교류를 이어갔다.

  몽골 통치 하에서 이루어졌던 세계적 규모의 교역체제는 당시 동아시아인들의 지리 인식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조선 태종 2년(1402)에 제작된 세계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해안선을 비롯하여 수면의 깊이가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항해 지식의 발전과 동아시아인들의 세계 인식의 변화를 드러낸다. 지도 하단에 나와 있는 권근이 발문을 썼으며, 일본에 필사본 2점이 보관되어 있다. 권근의 발문에 따르면 이 지도는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참고하여 제작했다. 권근은 『성교광피도』가 ‘매우 상세하고’, 청준의 『혼일강리도』에는 ‘역대 제왕의 연혁’이 잘 기재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 두 지도는 바로 원에서 제작된 지도이다. 특히 이택민의 지도는 원대 제작된 세계지도로 여기에 반영된 아프리카 지역은 이슬람권의 지도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68년 몽골이 멸망한 이후 반 세기가 지난 후 조선에서 제작된 이 지도를 통해 몽골의 유라시아 지배로 전개되었던 세계적 규모의 교역과 글로벌화의 물결이 동아시아인들의 세계 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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