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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해적 정일수는 어떻게 헐리우드까지 진출했을까

글_ 부경대학교 김경아

   2003년 개봉한 헐리우드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은 디즈니랜드의 인기 어트랙션 ‘캐러비안의 해적’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카리브해를 무대로 해적간의 스케일이 큰 전투와 보물을 좇는 모험담이 적절히 버무려진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거두었고,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시리즈가 출시되었다. 그중 3편 <캐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은 해적들의 활동무대가 카리브해에서 아시아의 바다로 확장되었고, 자연스럽게 아시아의 해적도 등장했다. 영화를 본 한국인이라면 90년대를 풍미한 홍콩 스타 저우룬파가 연기한 악당 해적 샤오펭에 눈길이 갔겠지만, 중국 해적의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권력을 지닌 9인의 해적 영주 중 하나인 ‘마담 칭(Mistress Qing)에 주목했을 것이다. 영화는 허구의 모험담이지만, ‘마담 칭’ 캐릭터는 중국의 실존 인물 정일수를 모티브로 삼았다. 19세기 초, 광둥의 해적 정일수는 단기간에 중국의 남부 바다를 장악해 청 수군뿐만 아니라 유럽의 상선과 무장 함대마저 공격하며 위세를 떨쳤다. 남성 중심으로 움직이던 해적 세계에서 정일수가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쳐 마침내 헐리우드 영화에까지 입성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해 보자.


기녀 석향고, 해적 정일과 혼인하다

   정일수의 성은 석(石)씨이고 어렸을 때 부르던 이름은 향고(香姑)이다. 1775년 광둥성 신후이(新會)에서 출생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녀는 소위 ‘바다 집시(sea gypsies)’로 알려진 단가인(疍家人)이어서 생애 관련 정보가 정확한 편이 아니다. 예로부터 단가인들은 광둥, 광시, 하이난, 푸젠 등 남부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생활했는데, 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뭍에 오르지 않았고, 일생을 배 위에서 지냈다. 해적은 바다와 배 위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야 했는데, 그래서인지 해적 중 단가인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그녀는 원래 기녀였으나, 홍기방 해적 두목 정일(鄭一)과 혼인하면서 해적 세계에 편입되었다. 당시 중국 남부 바다는 해적이 들끓었다. 1757년 건륭제가 광저우를 대외 유일무역항으로 지정하면서 동인도회사를 비롯한 유럽의 항각선들이 모두 마카오를 거쳐 광저우로 향했다. 그로 인해 광둥의 바다는 각 나라의 상선으로 북적이게 되었다. 중국 해적들은 광둥 인근의 무인도나 마카오 근해에 잠복해 있다가 상선을 약탈하기도 하고, 통행권(passport)을 강매하거나, 인신매매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거둬 들이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광둥의 해적은 6개의 큰 세력으로 나뉘는데, 이들은 외부 세력에 대항해 자신들의 이권을 보호하고자 연맹을 형성한다. 그리고 각기 홍, 흑, 백, 녹, 남, 황색 깃발을 배에 매달아 자신의 소속을 나타냈다. 그중 가장 큰 세력이 홍기방이었고, 정일은 바로 홍기방의 두목이었다. 석씨는 정일과 혼인했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정일의 아내라는 의미로 ‘정일수(鄭一嫂)’라고 불렀다.



[그림1] 중국의 해적

출처: ebay



남편의 레거시(Legacy), 해상권력을 장악하다

   정일수가 해적 세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1807년 남편이 죽고난 이후이다. 그녀는 재빨리 정씨 가문 중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과 남편의 충성스런 수하들을 규합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일의 양자였던 장보를 과감히 두 번째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장보는 원래 신후이 지역 어촌의 평범한 어민의 아들이었으나, 15세 되던 해 홍기방에게 납치되어 해적이 된 인물이다.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탓에 정일의 동성애 대상으로 줄곧 총애받았다고 하는데, 사실 그의 진정한 능력은 뛰어난 지략에 있었다. 정일수는 장보를 홍기방의 두목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대두목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움켜 쥐었다.


   해상세계는 육지의 봉건사회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불안정하고 변칙적이다. 바다와 바람은 변덕스럽고, 해적 활동은 늘 목숨을 잃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해적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고, 출신 성분도 노예, 범죄자, 수상거주민, 어민 등 다양했다. 이들에게 공동체라는 소속감을 심어주거나, 상부의 명령을 일사분란하게 따르게 하기란 상당히 어려웠다. 이에 정일수는 부하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방파 내 오로지 3개의 규율만을 제정해 따르도록 했다. 첫째는 명령없이 뭍에 오르면 안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허락 없이 납치한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강제로 취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위의 두 가지는 제약에 해당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으면 그 지휘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사형 시켰다. 셋째는 약탈한 재물은 반드시 공개된 장소에서 기록하고, 약탈에 공로가 있는 자에게 재물의 20%를 인센티브로 지급하며, 나머지는 공동기금으로 귀속시켜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즉, 소수의 우두머리가 재물을 독식하는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노력에 따른 보상은 홍기방 해적들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재물도 죽음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에 정일수는 스스로에게 종교적 신성성을 부여했다. 그녀는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를 통해 해적 사회에서 신봉했던 바다의 여신(三婆神)이 장보를 포함해 홍기방을 비호한다는 믿음을 퍼트렸고, 연맹 소속의 방파들은 점차 홍기방을 경외하기 시작했다. 정일수는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부하들에게 자주 성수(마늘물)를 뿌려 주었고, 이 성수가 적의 총탄을 막아주고 죽음으로부터 구해준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정일수는 해상세계의 불안정성과 변칙성을 엄격한 규율과 종교적 신성성으로 장악하며, 홍기방을 전성기로 이끌었다.



[그림2] 1836년 삽화로 우측에 치마를 입고 오른손에 레이피어를 든 여성이 정일수로 추정 

출처: Cultura Colectiva, Joshua Nathan



홍기방의 투항, 고명부인(誥命夫人)이 되다

   해적 세력의 확장은 청 수군과 유럽 함대의 견제로 이어졌다. 1808년, 해적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지자 청 수군이 본격적인 해적 토벌에 나서기 시작하고, 포르투갈을 포함한 유럽의 무장 함대와 연합해 해적들을 공격한다. 하지만 해적들은 광둥의 해로와 지리에 익숙했고, 해전이 벌어지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항했다. 여러 차례의 해전은 오히려 청 수군에 더 큰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양광총독에 새로 부임한 백령은 작전을 바꾸어 해적 토벌을 위한 강경책과 회유책을 같이 시행하기로 한다. 바다에 널빤지 한 조각도 띄우지 못하도록 강력한 해금령을 내려 해적들이 뭍에서 생필품을 구매하지 못하도록 유통 경로를 철저히 차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해적들에게 투항을 유도하는 초무(招撫) 정책을 편 것이다.



[그림3] <정해전도(靖海全圖)>의 일부분. 청 수군과 해적의 전투를 묘사

출처: 香港海事博物館



   당시 홍기방은 대외적으로는 청 수군과 유럽 함대와 여러 차례 무력으로 충돌해 세력이 약화되었고, 대내적으로는 흑기방과 내전을 치르는 등 서서히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백령의 정책으로 인해 해적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정일수는 부하들과 치열한 논의 끝에 마침내 투항을 결정한다. 하지만 관군의 회유책이 속임수일까봐 부하들이 두려워하자, 정일수는 직접 연약한 여인과 어린아이들로만 대표단을 구성했고, 백령을 찾아가 투항을 전제로 한 협상을 벌인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협상은 홍기방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타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10년 4월, 관방의 기록에 따르면 홍기방 해적 17,318명이 투항했고, 해적선 226척, 대포 1315대, 병기 2798점 등이 조정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해적사 연구가들은 당시 홍기방 해적 수가 2만~4만에 이르고, 보유하고 있던 해적선단도 조정에 보고한 규모보다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일수의 남편인 장보는 투항 후 수군의 군관직을 제수받아 해적 토벌의 선봉에 서게 된다. 광둥의 해로와 지리에 익숙한 장보는 연이은 군공을 세우고, 부장(副將)의 지위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정일수는 남편의 관직에 따라 조정으로부터 고명부인(誥命夫人)으로 봉해진다. 광둥 ‘바다 집시’ 출신의 기녀가 바다를 호령하는 해적 대두목으로, 그리고 다시 조정이 봉한 고명부인이 된 것이다. 1822년 장보가 죽자, 정일수는 난하이현(南海縣)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리고 1844년 69세로 사망하기 전까지 마카오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면서 소금 판매와 마약밀수에 관여한다. 아마 동서양 해적사를 통틀어 그녀처럼 천수와 명예를 누린 해적은 드물 것이다.


마담 칭, 서양을 매혹시키다

   광둥의 해적에 관한 이야기는 1831년 영국 런던에서 출간된 책, “History of the Pirates who Infested the China Sea from 1807 to 1810”으로 인해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은 독일 출신의 오리엔탈리스트 칼 프리드리히 노이만(Karl Friedrich Neumann)이 중국 광저우에서 구매한 『정해분기(靖海氛記)』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원저는 청 수군이 해적을 토벌한 과정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역자 노이만은 오히려 ‘광둥의 해적’에 포커스를 두고 편집해 출간했다. 특히 여해적 정일수에게 매료된 노이만은 부록의 첫머리에 고백하기를,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겨우 2편 밖에 모을 수 없었다고 쓰기도 했다. 노이만의 번역서는 그 동안 잔혹하지만 미지의 존재였던 중국 해적의 조직, 활동 범위, 규율, 종교, 관습 등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소개했고, 광둥의 바다를 장악한 해적 대두목 정일수를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존재로 인식시켰다.


   이후, 노이만의 번역서는 해적사에 관한 역사 기록 뿐만 아니라 문학 창작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친다. 1911년 필립 헨리 고세(Philip Henry Gosse)는 이를 바탕으로 해적사(“The history of piracy”)를 기술했고, 1933년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정일수를 모티브로 단편소설 ‘여해적 과부 칭(La viuda Ching, pirata)’을 썼다.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정일수는 청 황제에 대항하는 영웅적 면모를 갖춘 해적으로 묘사된다. 서양에서 정일수는 남편의 성씨인 ‘칭(鄭, Ching)’을 붙여 호칭되지만, 매력적이면서도 막강한 힘을 지닌 악명 높은 해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니 설령 영화라 할지라도 바다의 절대 권력을 지닌 9인의 해적 영주의 지위라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연히 그녀가 한 자리 차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림4] <캐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에 등장하는 마담칭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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