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대와 배제의 역학 -
글_ 중국절강해양대학 중문과 연광석
글_ 동서대학교 중국연구센터 연구교수 김지영
중국 상하이에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피하여 상하이로 도피한 유대인 난민들의 역사를 전시하는 ‘상하이 유대 난민 기념관’이 존재한다. 당시 상하이에는 2만 명을 상회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인구 구성은 영국 국적의 유대인 수백 명,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1) 4천여 명, 독일 및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1만 7천여 명,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1천여 명이었다.2) 상하이 전체에 15만여 명의 외국인이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숫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 이와 같이 많은 유대인 난민들이 중국으로 몰려 든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상하이라는 도시를 선택하였는가. 이는 당시 상하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과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사진1] 상하이 유대인 난민 기념관 내부
출처: 동서대학교 중국연구센터 김현진 책임연구원 개인소장사진
1930년대 히틀러의 광적인 반유대주의(Anti-semitism)로 인해 독일과 그 점령지에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유럽을 탈출하였는데, 유대인 난민 출신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들의 이러한 처지에 대하여 ‘파리아(pariah)’,3) 즉 ‘버려진 자’로 칭하기도 하였다. 유럽을 탈출한 유대인 난민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고, 극동 지역에서 많이 정착한 곳이 상하이였다. 당시 상하이는 제2차 상하이 사변[淞滬會戰]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점령한 직후였으며, 난민들은 유대인에 대한 일본 및 중국의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 및 재미 유대인 단체의 도움에 힘입어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그렇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이들은 ‘무국적 피난민 거주 구역[無國籍避難民指定居住區]’에 수용되어 곤궁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러한 상황 변화를 우리는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즉, 유대인 난민에 대한 일본의 정책 변화에 어떠한 요인이 작용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된다. 또한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들은 나치 독일에 치하에서는 홀로코스트를, 일본이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상하이에서는 격리 수용이라는 국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주위의 중국인들에게서는 배척받지 않은 독특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의 성격, 특히 ‘서발터니티(Subalternity) 여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럽의 유대인들이 상하이로 대거 이주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근대 시기 이전에도 유대인들이 중국 대륙으로 이주했던 사실은 존재하지만,4) 유대인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아편전쟁이 발발한 19세기 중엽 이후이다.
우선 유대인들 가운데, 영국 국적의 세파르딤들이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으로 이주를 하였다. 반면에, 러시아 출신의 아슈케나짐들은 19세기 말에 중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880년부터 10년간 이어진 기근에 따른 포그롬[Погром(Pogrom)] 및 제1차 세계대전 및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탄압이 주요한 원인이다. 러시아 출신들은 먼저 만주지역에 정착하였으나, 1931년에 만주국이 세워지고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상하이 혹은 중국의 기타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였다.
그렇지만 위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상하이 거주 유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독일/오스트리아/폴란드 출신의 아슈케나짐들은 1938-1939년 사이에 대거 이주하였다. 이들이 상하이로 이주하게 된 요인에는 상하이의 관문도시적 특징 및 사회적 상황이 존재한다.
1. 상하이의 관문도시적 특징
유대인 난민들이 상하이로 대거 몰려들었던 것에는 상하이가 관문도시(Gateway City)로서 가지고 있었던 도시적 특징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관문도시’는 외부와 경계를 짓는 역할을 하는데, 이에 권력의 공간이자 인식론적인 공간으로서 ‘개방과 폐쇄’ 및 ‘이음과 단절’의 이중적 성격이 작동하게 된다.
위에서도 밝혔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당시에 상하이의 유대인 인구는 2만여 명이었는데, 여기에는 근대 상하이의 관문도시적 특징과 연관된 두 가지의 원인이 존재한다.
첫째, 당시의 상하이는 유대인 난민들이 가장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유럽화 된 도시였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상하이는 아편전쟁을 통해 개방된 개항장 중 하나이다. 개항 이후에 상하이에는 조계가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조계를 통해 유입된 서양의 자본을 통해 급격한 도시화 및 상업화가 진행되었다. 근대 상하이는 극동에서 가장 유럽화된 도시였으므로. 당시 유럽 출신의 유대인들이 극동 지역에서는 가장 적응하기 쉬운 도시였다.
둘째, 당시의 상하이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개방적인 도시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에는 타국적의 외국인은 물론이요 무국적자들도 사실상 사증을 소지하지 않고 상하이에 들어올 수 있었다.5) 특히 1939년 9월 이전에는 외국인의 입국 시에 비자는 물론 경제적 담보도 필요 없었고, 미리 일자리를 구하거나 경찰의 품행증명서를 발급받을 필요도 없었다. 이는 제2차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이 상하이를 대부분 점령하면서, 국민정부는 상하이에서 철수하여 관할권 행사가 불가했고, 일본의 괴뢰정권 중화민국 유신정권(維新政權: 1938-1940년)도 상하이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핍박을 벗어난 유럽의 유대인 난민들 중 많은 수가 수용소에서 犯人이었고, 종종 불법적인 경로로 유럽을 탈출하여 거의 모두 무일푼 상태였기 때문에, 난민들의 입장에서는 외국인들의 입국이 엄격히 통제된 국가 혹은 통상 입국 수속을 밟아야 하는 국가에는 입국이 쉽지 않았다. 이 때, 외국인에게 문호가 완전히 열려있다시피 했던 상하이는 유대인 난민에게 있어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이 없었다.
[사진2] 상하이 와이탄(外灘) | [사진3] 유대인의 입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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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ohu.com | 출처: baidu.com |
2. 상하이의 사회적 상황
한 무리의 집단이 어떤 도시에 이주하고 정착하는데 있어 도시적 특징뿐만 아니라 사회적 상황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럽을 탈출한 유대인 난민들이 상하이로 이주한 또 다른 요인에는 당시 연합국이 합법적인 지배 세력으로 인정한 중국과 당시에 상하이를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일본(단, 일본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에 한정)이 유대인 난민들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사회적 상황이 존재한다.
중국의 경우, 쑹칭링[宋慶齡]6)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주요 인사들이 유대인 차별 및 탄압에 관해 독일 측에 강하게 항의한 바가 있으며, 중화민국 입법원장 쑨커[孫科]7)는 1939년에 유대인 거주 구역 지정과 관련한 계획을 입안할 때 나치 독일 치하에서 핍박받던 유대인의 처지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에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비엔나 주재 중국 총영사 허펑산[何鳳山]8)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대량으로 발급하여 그들의 탈출을 도왔다. 그 밖에 중국 공산당은 1941년 10월 기관지인 <解放日報>에 나치 독일의 파시즘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의 일본은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및 외교적인 이득을 얻고자 유대인 난민들에게 우호적이고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일대를 탈출한 유대인들의 상하이 진입을 막지 않았고, 일본 해군 내의 유대 문제 연구원 이누즈카 고레시게[犬塚 惟重]를 파견하여 이들이 유대인 거리를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하였다. 물론 일본에게는 유대인을 이용하여 중국 내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의도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1940년 상하이 공공조계에서 시행된 공부국(工部局) 이사회 선거에서 일본인들은 유대인 난민들의 표를 이용하여 상하이 조계 내에서의 권익을 독점하려고 하였다.
1. 중국의 태도 및 정책
중국은 전체적으로 유대인 난민들을 환대9)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여기에는 아래와 같은 3가지의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 중국과 유대인들의 역사적 관계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12세기 송(宋)의 카이펑을 중심으로 유대인 거주 구역이 존재하였다. 이후 수세기가 흐르면서 이들은 중국 내의 여러 민족들과 통혼하고 유대교 전통의 색채도 옅어졌지만, 이들의 존재는 중국과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관계가 생각보다 얕지 않음을 보여 준다.
둘째, 중국의 도시 중에서도 근대 상하이가 외부와의 경계 역할을 하는 관문도시이기에 가지고 있었던 국제성과 개방성이다. 당시의 상하이는 동아시아 최대의 항구도시로서 다른 중국의 도시들에 비해 외부인에 대하여 개방적이었기에, 유대인들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상하이시의 시민들도 유대인 난민을 적극적으로 돕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 상하이의 영향력 있는 잡지 중 하나인 『東方雜志』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상하이에는 여전히 십여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생활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언제나 힘껏 유대인 난민을 도울 수 있다.
(중략)
우리는 약소민족의 연합전선에 서서 약소민족을 업신여기는 적에 일치단결하여 맞서야만 한다.”10)
셋째, 중국의 주요 인사들은 유대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중국 정부 역시 유대인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예를 들면, 쑨원[孫文]은 1920년 4월 24일 유대 시온주의 운동가인 에즈라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의 활동을 지지한다는 뜻을 표한 바가 있으며, 1933년 5월 13일에는 쑹칭링[宋慶齡]을 대표로 하는 중국민권보장동맹이 주상하이 독일 영사에게 나치의 유대인을 향한 폭력을 강하게 항의하였다. 또한 쑨커는 1939년에 유대 민족이 2600여 년간 유랑하며 핍박을 받았고, 당시 파시즘이 세를 얻어감에 따라 유대 민족이 굉장한 학대를 받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중국 국민정부가 당시 유대인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은 유대인 난민에 대한 비자 발급 요건을 대폭 완화한다는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의 훈령에서 드러나는데, 이는 1938년부터 비엔나 주재 중국 총영사를 역임하였던 허펑산이 주독일 대사 천제[陳介]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스트리아를 떠나려는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이에 더불어, 유대인 난민들을 돕기 위한 실질적 조치가 취해지거나 계획이 수립되었다. 유대인 난민을 도운 실질적인 조치 중 하나는 허펑산의 유대인에 대한 중국비자 발급이다. 1938년에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단시간 내에 출국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석방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이때 서방 국가로의 망명을 거절당한 많은 이들이 중국 총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상하이를 입국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비자가 사실상 필요가 없었으나,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은 무비자로 출국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허펑산은 이들의 실제 목적지가 대부분 상하이가 아님을 알았으나, 인도주의 차원에서 2,000건의 비자를 승인하였고,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진4] 허펑산(何鳳山) | [사진5] 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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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ohu.com | 출처: baidu.com |
상하이로 들어오는 유대인 난민의 지속적 증가로 이들에 대한 수용이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화민국 입법원장 쑨커는 1939년에 ‘약소민족과 연합하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쑨원[孫文]의 유훈’, ‘영미와의 관계 개선’, ‘유대 자본을 이용한 경제 발전’을 명분으로, 중국 서남부에 ‘유대인 기거 구역(猶太人寄居區域)’을 조성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에서는 입국, 거류, 취직의 세 부분에서 무국적 유대인을 원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지만, 국민정부의 자금 부족 및 일본군의 해안지역 점령 및 봉쇄 등의 이유로 시행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사진6] 유대인 기거 구역 계획 제안서
출처: https://ahonline.drnh.gov.tw (國史館檔案史料文物查詢系統)
당시 중국 국민정부가 호의에 입각하여 유대인에게 실시하거나 계획했던 일련의 정책 혹은 조치들은 중국인들이 유대인에게 가졌던 무조건적 환대와는 달리 ‘국가의 이익’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다만, 중국민권보장동맹의 성명, 허펑산의 비자발급 조치 등에서 중국 정부 측의 계획 혹은 조치가 ‘인도주의적’ 성격도 다분히 포함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시 독일과의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고서라도 유대인에 대한 비자 발급 조건을 완화한 것은 이를 더욱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일본의 유대인 난민에 대한 태도 및 정책 변화
중국이 일관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하여 환대하는 태도를 가졌던 반면에, 일본은 필요 여부에 따라 그들을 이용하거나 배제(혹은 방치)11)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는 ‘유태 이용론(ユダヤ利用論)’이 저변에 깔려 있다. 이는 경제적 목적과 외교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선 전자는 상하이에 유대계의 자본과 기술자 집단 유치를 통해 전시 일본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일본이 유대인 난민에 대한 호의적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대일강경론을 누그러뜨린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일본 해군의 유대 문제 연구자인 이누즈카 고레시게를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그는 상하이 내에 유대인 자치구역을 조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 유대인 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이누즈카의 조치에 더불어,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기금 및 재미 유대인 단체의 원조자금을 통해, 유대인 난민들은 저우산루[舟山路] 및 훠산루[霍山路] 일대에 일명 ‘리틀 비엔나’로 불렸던 유대인 거리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사진7] 이누즈카 고레시게[犬塚 惟重] | [사진8] 상하이의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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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a.wikipedia.org | 출처: 関根 真保 『日本占領下の〈上海ユダヤ人ゲットー〉』, 2010 |
그렇지만, 일본이 1940년 9월에 추축국의 일원이 된 이후에는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일부 유대인들은 상하이를 떠나는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유대인 난민에 대한 태도 역시 배제(혹은 방치)로 돌아서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첫째,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미국과의 관계 악화이다. 일본의 ‘유태 이용론’은 ‘상하이의 유대인을 지렛대로 하는 미국 내의 유대 자본을 통한 경제 활성화와 미국과의 외교 협상’이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전쟁으로 외교 관계는 파탄이 났고 재미 유대인의 자본 이용도 불가능해지자, 상하이의 유대인들은 일본에게 골칫거리로 남아버렸다.
둘째,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나치 독일이 일본에 상하이 유대인 난민에 대한 ‘최종 해결’을 시행할 것을 압박해 왔던 것이다. 1942년 7월경 독일 친위대(SS) 대령 요제프 마이징거는 유대인 난민에 대한 ‘최종 해결’을 일본 관리들에게 제안하였다. 이는 나치가 일본에게 ‘유대인 절멸 계획’에 동참하라고 요구한 것에 다름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일본은 훙커우[虹口] 일대에 ‘무국적 피난민 지정 거주구[無国籍避難民指定居住区, 일명 ‘上海ゲットー’]’를 만들고 무국적 유대인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일본의 이러한 결정은 인도주의적 동정심의 발로가 아니라, 유대인 난민들을 당시 일본의 적성국이었던 미국인, 영국인과 동일시하여 이들을 집단적으로 격리 및 감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에 1943년 2월 18일에 『무국적 피난민의 거주, 영업 제한에 관한 건[無國籍避難民の居住、營業の制限に關する件]』의 포고를 발표하여, 공공조계의 동부 지역12)을 피난민 거주구로 지정하고 무국적 피난민의 거주 및 영업 활동 영역을 이곳으로 제한하였다. 거주구에 수용된 1만 5천여 명의 유대인 난민들은 재미 유대인의 원조를 비롯한 외부로부터 물자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고난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유대인 난민들을 적성국의 국민들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거주구역에 몰아넣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곳이 결과론적으로 나치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참화를 피하여 생명을 보전하는 피난처가 된 것이다.
[사진9] ‘무국적 피난민 지정 거주구’ 위치
출처: 상하이 유대인 난민 기념관 소책자
요약하자면, 일본의 유대인 난민에 대한 태도 변화 역시 ‘국가의 이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과 달리 일본은 ‘유대 이용론’이라는 말 자체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식을 공공연히 드러낸 점이 다르다. 또한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역시 전쟁 발발 후에 재미 유대인과의 관계 단절로 상하이 유대인 난민의 이용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을 한곳에 모아 수용한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의 보호가 아니라 격리하여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와 같이 ‘국가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환대(혹은 호의)와 배제(혹은 방치)의 역학 속에서 나치와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유대인 난민들을 서발터니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서발터니티는 ‘서발턴(subaltern)’에서 도출된 개념으로, 그 기원에는 ‘한 사회의 헤게모니를 구성하지 못하는 종속집단(그람시)’, ‘특정 사회에서 다수자가 해독할 수 없는 소수자(구하)’, ‘기득권이 이데올로기로 왜곡하여 해독 및 재현이 불가능한 존재(스피박)’이 있다. 이외에도 크리스테바의 ‘비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랑시에르의 ‘몫이 없는 자’ 등이 서발턴과 유사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서발턴의 여러 속성이 추상화 및 개념화된 결과가 바로 서발터니티이다.
이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은 나치와 이들이 효용가치가 떨어지자 방치하다시피 했던 일본을 경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유대인들이 주동적으로 행동으로 인해 맞이한 결과가 아니라, 지배 권력의 척결 혹은 배척(방치)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어진 결과이다. 즉,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들은 지배 권력에 의해서 ‘타자화’된 ‘파리아’였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피난민 거주 구역에 수용되어 해외 유대인 동포들의 도움조차 받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면서 그들의 발언권마저 약해졌다는 점에서는 서발터니티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그들을 거주 지역에 수용하고 방치한 것이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홀로코스트의 참화를 피하고 목숨을 구제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고, 그들이 접촉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호의를 베풀었다는 점은 상하이 유대인 난민의 독특한 특징이다.
현재, 세계의 곳곳에서 난민 문제로 인해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유럽 각국에서 이를 반대하는 극우 정당들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고, 취임 시에 7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캐나다 트뤼도 총리의 사임에는 난민 및 이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책임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이민 및 난민에 대한 장벽을 세우고 있다. 즉, 이상주의로는 현실문제를 타개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워키즘(wokeism)에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관문도시라는 특수한 공간인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에 관한 본고의 연구는 난민 문제를 대함에 있어 하나의 시선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1) 이들은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나 주로 인도 및 중동에 거주하였으며, 세파르딤(ספרדים, Sephardim) 계열로 분류된다.
2) 이들은 모두 아슈케나짐(אשכנזים, Ashkenazim) 계열로 분류된다.
3)‘파리아’는 ‘불가촉천민’을 의미하는 타밀어 ‘파라이야르(பறையர், Paraiyar)’에서 파생된 말로서, ‘사회적 이방인(Social Outcast)’를 의미한다.
4) 이들은 12세기 무렵에 카이펑 지역에 시나고그를 세우고 이후에도 이를 중심으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도 카이펑 유대인(开封犹太人)으로 불린다. 다만, 현재의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의 유대교적 전통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스라엘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5) 물론, 민국시기에도 외국인의 여권 및 사증에 관한 법률은 존재하였다.
6) 쑹칭링[宋慶齡]은 쑨원의 미망인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와 대립하던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7) 쑨원의 외아들이며, 중화민국의 행정원장(行政院長, 1932년 1월 1일-1932년 1월 28일), 입법원장(立法院長, 1932년 1월 28일-1948년 5월 27일)을 역임하였다.
8) 허펑산은 1937년 초에 ‘1등 비서급 2등 비서’로 주오스트리아 공사관에서 근무를 시작하였으며, 1938년에 공사관이 영사관으로 개편되면서 총영사의 자리에 올랐다.
9) ‘환대(hospitality)’는 레비나스와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데리다 사상의 주요 개념이다. 데리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환대’와 이름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조건부적인 환대’로 대별한다.
10) 賀益文, 「猶太民族問題」, 『東方雜志』 第36卷 第12號, 1939.
11) 배제는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로서 인간적 삶을 필요로 하지만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상태를 가리킨다.
12) 격리 구역의 범위의 면적은 약 3평방 킬로미터로 제한되며 거주 구역은 동쪽에 다롄로[大連路], 서쪽에서 자오펑로兆豐路[현재 가오양로高陽路], 마오하이로茂海路[현재 하이먼로海門路], 덩퉈로鄧脫路[현재 단투로丹徒路], 남쪽은 후이민로[惠民路]에 이르고, 북쪽은 저우자쭈이루로[周家嘴路]에 이른다. 면적은 약 3평방 킬로미터로 40개의 블록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 상하이에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피하여 상하이로 도피한 유대인 난민들의 역사를 전시하는 ‘상하이 유대 난민 기념관’이 존재한다. 당시 상하이에는 2만 명을 상회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인구 구성은 영국 국적의 유대인 수백 명,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1) 4천여 명, 독일 및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1만 7천여 명,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1천여 명이었다.2) 상하이 전체에 15만여 명의 외국인이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숫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 이와 같이 많은 유대인 난민들이 중국으로 몰려 든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상하이라는 도시를 선택하였는가. 이는 당시 상하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과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사진1] 상하이 유대인 난민 기념관 내부
출처: 동서대학교 중국연구센터 김현진 책임연구원 개인소장사진
1930년대 히틀러의 광적인 반유대주의(Anti-semitism)로 인해 독일과 그 점령지에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유럽을 탈출하였는데, 유대인 난민 출신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들의 이러한 처지에 대하여 ‘파리아(pariah)’,3) 즉 ‘버려진 자’로 칭하기도 하였다. 유럽을 탈출한 유대인 난민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고, 극동 지역에서 많이 정착한 곳이 상하이였다. 당시 상하이는 제2차 상하이 사변[淞滬會戰]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점령한 직후였으며, 난민들은 유대인에 대한 일본 및 중국의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 및 재미 유대인 단체의 도움에 힘입어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그렇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이들은 ‘무국적 피난민 거주 구역[無國籍避難民指定居住區]’에 수용되어 곤궁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러한 상황 변화를 우리는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즉, 유대인 난민에 대한 일본의 정책 변화에 어떠한 요인이 작용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된다. 또한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들은 나치 독일에 치하에서는 홀로코스트를, 일본이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상하이에서는 격리 수용이라는 국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주위의 중국인들에게서는 배척받지 않은 독특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의 성격, 특히 ‘서발터니티(Subalternity) 여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럽의 유대인들이 상하이로 대거 이주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근대 시기 이전에도 유대인들이 중국 대륙으로 이주했던 사실은 존재하지만,4) 유대인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아편전쟁이 발발한 19세기 중엽 이후이다.
우선 유대인들 가운데, 영국 국적의 세파르딤들이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으로 이주를 하였다. 반면에, 러시아 출신의 아슈케나짐들은 19세기 말에 중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880년부터 10년간 이어진 기근에 따른 포그롬[Погром(Pogrom)] 및 제1차 세계대전 및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탄압이 주요한 원인이다. 러시아 출신들은 먼저 만주지역에 정착하였으나, 1931년에 만주국이 세워지고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상하이 혹은 중국의 기타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였다.
그렇지만 위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상하이 거주 유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독일/오스트리아/폴란드 출신의 아슈케나짐들은 1938-1939년 사이에 대거 이주하였다. 이들이 상하이로 이주하게 된 요인에는 상하이의 관문도시적 특징 및 사회적 상황이 존재한다.
1. 상하이의 관문도시적 특징
유대인 난민들이 상하이로 대거 몰려들었던 것에는 상하이가 관문도시(Gateway City)로서 가지고 있었던 도시적 특징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관문도시’는 외부와 경계를 짓는 역할을 하는데, 이에 권력의 공간이자 인식론적인 공간으로서 ‘개방과 폐쇄’ 및 ‘이음과 단절’의 이중적 성격이 작동하게 된다.
위에서도 밝혔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당시에 상하이의 유대인 인구는 2만여 명이었는데, 여기에는 근대 상하이의 관문도시적 특징과 연관된 두 가지의 원인이 존재한다.
첫째, 당시의 상하이는 유대인 난민들이 가장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유럽화 된 도시였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상하이는 아편전쟁을 통해 개방된 개항장 중 하나이다. 개항 이후에 상하이에는 조계가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조계를 통해 유입된 서양의 자본을 통해 급격한 도시화 및 상업화가 진행되었다. 근대 상하이는 극동에서 가장 유럽화된 도시였으므로. 당시 유럽 출신의 유대인들이 극동 지역에서는 가장 적응하기 쉬운 도시였다.
둘째, 당시의 상하이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개방적인 도시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에는 타국적의 외국인은 물론이요 무국적자들도 사실상 사증을 소지하지 않고 상하이에 들어올 수 있었다.5) 특히 1939년 9월 이전에는 외국인의 입국 시에 비자는 물론 경제적 담보도 필요 없었고, 미리 일자리를 구하거나 경찰의 품행증명서를 발급받을 필요도 없었다. 이는 제2차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이 상하이를 대부분 점령하면서, 국민정부는 상하이에서 철수하여 관할권 행사가 불가했고, 일본의 괴뢰정권 중화민국 유신정권(維新政權: 1938-1940년)도 상하이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핍박을 벗어난 유럽의 유대인 난민들 중 많은 수가 수용소에서 犯人이었고, 종종 불법적인 경로로 유럽을 탈출하여 거의 모두 무일푼 상태였기 때문에, 난민들의 입장에서는 외국인들의 입국이 엄격히 통제된 국가 혹은 통상 입국 수속을 밟아야 하는 국가에는 입국이 쉽지 않았다. 이 때, 외국인에게 문호가 완전히 열려있다시피 했던 상하이는 유대인 난민에게 있어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이 없었다.
[사진2] 상하이 와이탄[外灘]
출처: baidu.com
[사진3] 유대인의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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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하이의 사회적 상황
한 무리의 집단이 어떤 도시에 이주하고 정착하는데 있어 도시적 특징뿐만 아니라 사회적 상황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럽을 탈출한 유대인 난민들이 상하이로 이주한 또 다른 요인에는 당시 연합국이 합법적인 지배 세력으로 인정한 중국과 당시에 상하이를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일본(단, 일본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에 한정)이 유대인 난민들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사회적 상황이 존재한다.
중국의 경우, 쑹칭링[宋慶齡]6)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주요 인사들이 유대인 차별 및 탄압에 관해 독일 측에 강하게 항의한 바가 있으며, 중화민국 입법원장 쑨커[孫科]7)는 1939년에 유대인 거주 구역 지정과 관련한 계획을 입안할 때 나치 독일 치하에서 핍박받던 유대인의 처지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에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비엔나 주재 중국 총영사 허펑산[何鳳山]8)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대량으로 발급하여 그들의 탈출을 도왔다. 그 밖에 중국 공산당은 1941년 10월 기관지인 <解放日報>에 나치 독일의 파시즘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의 일본은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및 외교적인 이득을 얻고자 유대인 난민들에게 우호적이고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일대를 탈출한 유대인들의 상하이 진입을 막지 않았고, 일본 해군 내의 유대 문제 연구원 이누즈카 고레시게[犬塚 惟重]를 파견하여 이들이 유대인 거리를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하였다. 물론 일본에게는 유대인을 이용하여 중국 내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의도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1940년 상하이 공공조계에서 시행된 공부국(工部局) 이사회 선거에서 일본인들은 유대인 난민들의 표를 이용하여 상하이 조계 내에서의 권익을 독점하려고 하였다.
1. 중국의 태도 및 정책
중국은 전체적으로 유대인 난민들을 환대9)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여기에는 아래와 같은 3가지의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 중국과 유대인들의 역사적 관계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12세기 송(宋)의 카이펑을 중심으로 유대인 거주 구역이 존재하였다. 이후 수세기가 흐르면서 이들은 중국 내의 여러 민족들과 통혼하고 유대교 전통의 색채도 옅어졌지만, 이들의 존재는 중국과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관계가 생각보다 얕지 않음을 보여 준다.
둘째, 중국의 도시 중에서도 근대 상하이가 외부와의 경계 역할을 하는 관문도시이기에 가지고 있었던 국제성과 개방성이다. 당시의 상하이는 동아시아 최대의 항구도시로서 다른 중국의 도시들에 비해 외부인에 대하여 개방적이었기에, 유대인들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상하이시의 시민들도 유대인 난민을 적극적으로 돕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 상하이의 영향력 있는 잡지 중 하나인 『東方雜志』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상하이에는 여전히 십여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생활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언제나 힘껏 유대인 난민을 도울 수 있다.
(중략)
우리는 약소민족의 연합전선에 서서 약소민족을 업신여기는 적에 일치단결하여 맞서야만 한다.”10)
셋째, 중국의 주요 인사들은 유대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중국 정부 역시 유대인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예를 들면, 쑨원[孫文]은 1920년 4월 24일 유대 시온주의 운동가인 에즈라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의 활동을 지지한다는 뜻을 표한 바가 있으며, 1933년 5월 13일에는 쑹칭링[宋慶齡]을 대표로 하는 중국민권보장동맹이 주상하이 독일 영사에게 나치의 유대인을 향한 폭력을 강하게 항의하였다. 또한 쑨커는 1939년에 유대 민족이 2600여 년간 유랑하며 핍박을 받았고, 당시 파시즘이 세를 얻어감에 따라 유대 민족이 굉장한 학대를 받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중국 국민정부가 당시 유대인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은 유대인 난민에 대한 비자 발급 요건을 대폭 완화한다는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의 훈령에서 드러나는데, 이는 1938년부터 비엔나 주재 중국 총영사를 역임하였던 허펑산이 주독일 대사 천제[陳介]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스트리아를 떠나려는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이에 더불어, 유대인 난민들을 돕기 위한 실질적 조치가 취해지거나 계획이 수립되었다. 유대인 난민을 도운 실질적인 조치 중 하나는 허펑산의 유대인에 대한 중국비자 발급이다. 1938년에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단시간 내에 출국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석방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이때 서방 국가로의 망명을 거절당한 많은 이들이 중국 총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상하이를 입국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비자가 사실상 필요가 없었으나,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은 무비자로 출국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허펑산은 이들의 실제 목적지가 대부분 상하이가 아님을 알았으나, 인도주의 차원에서 2,000건의 비자를 승인하였고,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진4] 허펑산[何鳳山]
출처: sohu.com
[사진5] 비자
출처: baidu.com
상하이로 들어오는 유대인 난민의 지속적 증가로 이들에 대한 수용이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화민국 입법원장 쑨커는 1939년에 ‘약소민족과 연합하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쑨원[孫文]의 유훈’, ‘영미와의 관계 개선’, ‘유대 자본을 이용한 경제 발전’을 명분으로, 중국 서남부에 ‘유대인 기거 구역(猶太人寄居區域)’을 조성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에서는 입국, 거류, 취직의 세 부분에서 무국적 유대인을 원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지만, 국민정부의 자금 부족 및 일본군의 해안지역 점령 및 봉쇄 등의 이유로 시행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사진6] 유대인 기거 구역 계획 제안서
출처: https://ahonline.drnh.gov.tw (國史館檔案史料文物查詢系統)
당시 중국 국민정부가 호의에 입각하여 유대인에게 실시하거나 계획했던 일련의 정책 혹은 조치들은 중국인들이 유대인에게 가졌던 무조건적 환대와는 달리 ‘국가의 이익’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다만, 중국민권보장동맹의 성명, 허펑산의 비자발급 조치 등에서 중국 정부 측의 계획 혹은 조치가 ‘인도주의적’ 성격도 다분히 포함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시 독일과의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고서라도 유대인에 대한 비자 발급 조건을 완화한 것은 이를 더욱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일본의 유대인 난민에 대한 태도 및 정책 변화
중국이 일관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하여 환대하는 태도를 가졌던 반면에, 일본은 필요 여부에 따라 그들을 이용하거나 배제(혹은 방치)11)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는 ‘유태 이용론(ユダヤ利用論)’이 저변에 깔려 있다. 이는 경제적 목적과 외교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선 전자는 상하이에 유대계의 자본과 기술자 집단 유치를 통해 전시 일본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일본이 유대인 난민에 대한 호의적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대일강경론을 누그러뜨린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일본 해군의 유대 문제 연구자인 이누즈카 고레시게를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그는 상하이 내에 유대인 자치구역을 조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 유대인 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이누즈카의 조치에 더불어,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기금 및 재미 유대인 단체의 원조자금을 통해, 유대인 난민들은 저우산루[舟山路] 및 훠산루[霍山路] 일대에 일명 ‘리틀 비엔나’로 불렸던 유대인 거리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사진7] 이누즈카 고레시게[犬塚 惟重]
출처: ja.wikipia.org
[사진8] 상하이의 유대인
출처: 関根 真保 『日本占領下の〈上海ユダヤ人ゲットー〉』, 2010
그렇지만, 일본이 1940년 9월에 추축국의 일원이 된 이후에는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일부 유대인들은 상하이를 떠나는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유대인 난민에 대한 태도 역시 배제(혹은 방치)로 돌아서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첫째,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미국과의 관계 악화이다. 일본의 ‘유태 이용론’은 ‘상하이의 유대인을 지렛대로 하는 미국 내의 유대 자본을 통한 경제 활성화와 미국과의 외교 협상’이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전쟁으로 외교 관계는 파탄이 났고 재미 유대인의 자본 이용도 불가능해지자, 상하이의 유대인들은 일본에게 골칫거리로 남아버렸다.
둘째,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나치 독일이 일본에 상하이 유대인 난민에 대한 ‘최종 해결’을 시행할 것을 압박해 왔던 것이다. 1942년 7월경 독일 친위대(SS) 대령 요제프 마이징거는 유대인 난민에 대한 ‘최종 해결’을 일본 관리들에게 제안하였다. 이는 나치가 일본에게 ‘유대인 절멸 계획’에 동참하라고 요구한 것에 다름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일본은 훙커우[虹口] 일대에 ‘무국적 피난민 지정 거주구[無国籍避難民指定居住区, 일명 ‘上海ゲットー’]’를 만들고 무국적 유대인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일본의 이러한 결정은 인도주의적 동정심의 발로가 아니라, 유대인 난민들을 당시 일본의 적성국이었던 미국인, 영국인과 동일시하여 이들을 집단적으로 격리 및 감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에 1943년 2월 18일에 『무국적 피난민의 거주, 영업 제한에 관한 건[無國籍避難民の居住、營業の制限に關する件]』의 포고를 발표하여, 공공조계의 동부 지역12)을 피난민 거주구로 지정하고 무국적 피난민의 거주 및 영업 활동 영역을 이곳으로 제한하였다. 거주구에 수용된 1만 5천여 명의 유대인 난민들은 재미 유대인의 원조를 비롯한 외부로부터 물자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고난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유대인 난민들을 적성국의 국민들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거주구역에 몰아넣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곳이 결과론적으로 나치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참화를 피하여 생명을 보전하는 피난처가 된 것이다.
[사진9] 무국적 피난민 지정 거주구’ 위치
출처: 상하이 유대인 난민 기념관 소책자
요약하자면, 일본의 유대인 난민에 대한 태도 변화 역시 ‘국가의 이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과 달리 일본은 ‘유대 이용론’이라는 말 자체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식을 공공연히 드러낸 점이 다르다. 또한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역시 전쟁 발발 후에 재미 유대인과의 관계 단절로 상하이 유대인 난민의 이용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을 한곳에 모아 수용한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의 보호가 아니라 격리하여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와 같이 ‘국가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환대(혹은 호의)와 배제(혹은 방치)의 역학 속에서 나치와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유대인 난민들을 서발터니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서발터니티는 ‘서발턴(subaltern)’에서 도출된 개념으로, 그 기원에는 ‘한 사회의 헤게모니를 구성하지 못하는 종속집단(그람시)’, ‘특정 사회에서 다수자가 해독할 수 없는 소수자(구하)’, ‘기득권이 이데올로기로 왜곡하여 해독 및 재현이 불가능한 존재(스피박)’이 있다. 이외에도 크리스테바의 ‘비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랑시에르의 ‘몫이 없는 자’ 등이 서발턴과 유사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서발턴의 여러 속성이 추상화 및 개념화된 결과가 바로 서발터니티이다.
이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은 나치와 이들이 효용가치가 떨어지자 방치하다시피 했던 일본을 경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유대인들이 주동적으로 행동으로 인해 맞이한 결과가 아니라, 지배 권력의 척결 혹은 배척(방치)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어진 결과이다. 즉,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들은 지배 권력에 의해서 ‘타자화’된 ‘파리아’였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피난민 거주 구역에 수용되어 해외 유대인 동포들의 도움조차 받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면서 그들의 발언권마저 약해졌다는 점에서는 서발터니티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그들을 거주 지역에 수용하고 방치한 것이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홀로코스트의 참화를 피하고 목숨을 구제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고, 그들이 접촉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호의를 베풀었다는 점은 상하이 유대인 난민의 독특한 특징이다.
현재, 세계의 곳곳에서 난민 문제로 인해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유럽 각국에서 이를 반대하는 극우 정당들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고, 취임 시에 7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캐나다 트뤼도 총리의 사임에는 난민 및 이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책임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이민 및 난민에 대한 장벽을 세우고 있다. 즉, 이상주의로는 현실문제를 타개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워키즘(wokeism)에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관문도시라는 특수한 공간인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에 관한 본고의 연구는 난민 문제를 대함에 있어 하나의 시선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1) 이들은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나 주로 인도 및 중동에 거주하였으며, 세파르딤(ספרדים, Sephardim) 계열로 분류된다.
2) 이들은 모두 아슈케나짐(אשכנזים, Ashkenazim) 계열로 분류된다.
3)‘파리아’는 ‘불가촉천민’을 의미하는 타밀어 ‘파라이야르(பறையர், Paraiyar)’에서 파생된 말로서, ‘사회적 이방인(Social Outcast)’를 의미한다.
4) 이들은 12세기 무렵에 카이펑 지역에 시나고그를 세우고 이후에도 이를 중심으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도 카이펑 유대인(开封犹太人)으로 불린다. 다만, 현재의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의 유대교적 전통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스라엘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5) 물론, 민국시기에도 외국인의 여권 및 사증에 관한 법률은 존재하였다.
6) 쑹칭링[宋慶齡]은 쑨원의 미망인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와 대립하던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7) 쑨원의 외아들이며, 중화민국의 행정원장(行政院長, 1932년 1월 1일-1932년 1월 28일), 입법원장(立法院長, 1932년 1월 28일-1948년 5월 27일)을 역임하였다.
8) 허펑산은 1937년 초에 ‘1등 비서급 2등 비서’로 주오스트리아 공사관에서 근무를 시작하였으며, 1938년에 공사관이 영사관으로 개편되면서 총영사의 자리에 올랐다.
9) ‘환대(hospitality)’는 레비나스와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데리다 사상의 주요 개념이다. 데리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환대’와 이름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조건부적인 환대’로 대별한다.
10) 賀益文, 「猶太民族問題」, 『東方雜志』 第36卷 第12號, 1939.
11) 배제는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로서 인간적 삶을 필요로 하지만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상태를 가리킨다.
12) 격리 구역의 범위의 면적은 약 3평방 킬로미터로 제한되며 거주 구역은 동쪽에 다롄로[大連路], 서쪽에서 자오펑로兆豐路[현재 가오양로高陽路], 마오하이로茂海路[현재 하이먼로海門路], 덩퉈로鄧脫路[현재 단투로丹徒路], 남쪽은 후이민로[惠民路]에 이르고, 북쪽은 저우자쭈이루로[周家嘴路]에 이른다. 면적은 약 3평방 킬로미터로 40개의 블록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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