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동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석사과정생 우준성
글_ 동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석사과정생 우준성
오늘날 세계는 여러 측면에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를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글로벌화가 심화되면서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사회 구조가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국가 간 관계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대만은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다양성을 갖춘 지역으로, 현대 사회에서 다양성이 가지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대만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반도체 산업을 비롯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지역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미·중 경쟁이 심화되면서 대만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으며, 대만해협에서의 긴장감은 세계 경제와 안보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의 대만 인식은 어떠할까? 일본, 중국 등 주변국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러시아를 비롯한 지리적, 문화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여러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형성되어 있다. 반면에 대만의 경우 ‘중국의 일부’로 생각하거나 ‘타이완(Taiwan)’이라는 이름 때문에 태국(Thailand)과 혼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실정이다. 그렇다면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경험도 공유해 온 대만에 대해서 우리는 왜 이러한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 중요성이 주목받는 현재, 어떻게 대만을 바라봐야 할까?
[그림1] 대만의 다양성
자료: AI (ChatGPT) 생성형 이미지
역사적으로 대만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크게 변해왔다. 17세기 이전, 대만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간 해상 무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주목받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24년 대만 남부에 요새를 세워 통치하며 한족 이민자들의 이주를 촉진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로네시아계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대만의 경제와 인구 구조는 크게 변화했다. 이후 1662년 명나라의 정성공(鄭成功)이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대만을 반청 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대만을 정치적 거점으로 이용하며 자립적인 통치를 시도했으나, 그의 후손들이 세운 정씨 왕국은 1683년 청나라에 의해 무너졌다. 청나라의 통치 아래 대만은 중국 본토에 편입되었으나, 초기에는 변방 지역으로 간주되어 중요성이 낮게 평가되었다. 청나라는 한족 이주를 규제하다가 점차 완화되었고, 대만으로 이주한 한족 농민들은 원주민들과 충돌하며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대만은 중국 본토와 다른 다층적 정체성을 가진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편,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馬關條約)으로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면서 대만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일본은 대만을 남방 진출의 거점으로 이용하기 위해 철도, 항만, 공공시설을 대규모로 구축하며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동시에 대만인을 ‘황민(皇民)’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일본어 교육이 강제되었고, 대만인은 일본 신사에 참배해야 했다. 일본의 식민 통치는 대만의 경제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나, 이는 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만은 일본으로부터 중화민국으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끝나고 공산당이 승리하자, 국민당 정권은 대만으로 이전하며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 시기 대만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진영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하는 ‘자유중국’으로 간주되었다. 미국과의 동맹은 대만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으나,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UN에 가입하면서 대만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만은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이루며 다시금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과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 고립은 여전히 대만은 지위를 제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지금까지 대만에 대한 국제적 인식은 외부 세력의 관점에서 규정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중국 중심적 시각은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축소했고, 일본 식민지 시각은 대만을 자원의 공급지와 제국의 거점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냉전 상황에서의 시각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대만을 간주했다. 한국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과 대만은 역사상 어떤 중심에 의해 매개되어 교류했던 동아시아의 주변적 존재였다. 중화제국, 일본제국, 냉전 시기 미국에 의해 연결된 것으로 서로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한국인으로서 처음 대만에 건너간 사람은 조선왕조 시대 표류민이다. 1727년 해난사고를 당해 표류 끝에 대만에 도착해 그곳에 머물다 서울로 돌아온 30여명의 조선인 이야기가 기록에 처음 나온다. 그 후 1877년까지 15회에 걸쳐 총 170명의 표류민이 대만을 거쳐왔다. 그들은 타이베이-아모이(厦门, 샤먼)-푸저우(福州)-베이징-의주(義州) 노선을 거쳐 귀환했다. 이 노선에서 잘 드러나듯이 대만과 조선은 청조를 매개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후 실질적으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서이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책에 저항한 3·1운동이 발생한 직후 생업을 잇기 힘든 일부 민중들이 대만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그 뒤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일본제국의 강제징용에 의해 대만으로 간 이주자들도 있다. 1,300명으로 추산되는 조선 남부의 어민과 그들의 생산수단인 선박이 태평양 지역의 물자 수송을 위해 대만으로 강제동원되었다. 그밖에 자의 또는 타의로 대만에서 창기(娼妓)로 생계를 유지했던 여성들도 상당수 존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당시의 일간지에 실린 여행기류는 한국인의 대만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대만은 사계절이 여름인 남국, 토착민이 사는 야만의 땅이자 경제면에서 일본제국 경제권 내 경쟁과 협력의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즉, 당시 한국인의 대만인식은 같은 일제 식민지로서 연민을 느끼면서도 문화적 우월감이 혼재된 것이었다. 이처럼 대만으로 간 이주자 사례는 물론이고 한국인의 대만 인식에 일본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시기에는 일본제국을 매개로 한국과 대만은 연결되었다.
1945년 일본제국이 물러나자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을 즉각 접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에 대륙을 내주고 대만섬으로 넘어온 장제스(蔣介石) 정권이 그곳을 거점으로 중화민국의 법통을 유지하였다. 대만의 중화민국은 냉전기, 특히 한국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공산중국에 대치한 자유진영의 전초기지로서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지탱되었다. 자유진영의 구성원 한국과 대만은 이번에는 미국과의 수직적인 양자 관계를 매개로 간접적으로 교류한 것이다. 이런 단계에서 1992년 대한민국 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국교를 수립한 것의 부수작용으로 대만과의 국교단절이 이뤄졌다. 이로써 그때까지 우방이던 양국관계는 냉랭해졌다. 이후 20여년 간 한국에게 중화권 국가로서 종주국은 대륙 중국으로 재조정되면서 대만은 더더욱 상상 불가능한 지역으로 주변화하고 말았다. 따라서 보통의 한국인에게 대만은 아예 비워져버린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대만을 바라보는 시각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왔으며, 한국과 대만의 관계 또한 외부 세력에 의해 규정된 측면이 크다. 그 결과, 두 지역 간의 자율적 교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단교 이후 이러한 단절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만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연장선에서만 이해될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대만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관점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과거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인식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인지, 혹은 변화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한류의 확산이나 여행객의 증가로 인한 한국과 대만의 교류가 늘어나고 있다. 때문에 양 지역간의 관계가 단순히 외교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경제, 문화, 사회적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지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 앞으로 한국 사회가 대만을 어떻게 인식하고 관계를 형성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요구될 때이다.
[그림2] 한국-대만 관계
자료: 게티이미지뱅크
1) 성을 매매한 여성을 지칭함.
[ 참고 문헌 ]
단행본
1. 궈팅위 외, 신효정 역, 『도해 타이완사』, 글항아리, 2021.
2. 우이룽, 박소정 역, 『드디어 만나는 대만사 수업』, 현대지성, 2024.
3. 최원식, 백영서 『대만을 보는 눈: 한국-대만, 공생의 길을 찾아서』, 창비, 2012.
연구논문
임대근, 「한국인의 대만 인식: 대중문화 경험을 중심으로」, 『대만연구』 제10호, 2017, pp.29-42
1) 성을 매매한 여성을 지칭함.
[ 참고 문헌 ]
단행본
1. 「궈팅위 외, 신효정 역, 『도해 타이완사』, 글항아리, 2021.
2. 우이룽, 박소정 역, 『드디어 만나는 대만사 수업』, 현대지성, 2024.
3. 최원식, 백영서 『대만을 보는 눈: 한국-대만, 공생의 길을 찾아서』, 창비, 2012.
연구논문
임대근, 「한국인의 대만 인식: 대중문화 경험을 중심으로」, 『대만연구』 제10호, 2017, pp.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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