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학의 풍향계
장제스(蔣介石) 연구 어디로 가나?
현 중국저장대학 장제스연구소 객좌교수, 전 신라대학 사학과 교수 배경한
1. 장제스와 현대중국
20세기 전반기 중국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로 장제스를 꼽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왕조가 멸망한 다음 새로운 국가체제(국민국가)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1920년대의 국민혁명을 통하여 장제스는 군사적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며 전국적 지도자로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장제스는 1928년에 만들어진 난징(南京) 국민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며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당 군대에 패하여 타이완(臺灣)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대륙의 최고 정치지도자였다. 장제스는 국가 주석이나 행정원장, 외교부장, 국민당 총재 등 다양한 직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최고 권력을 유지시켜준 핵심 지위는 최고의 군사권을 가지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난징 국민정부를 군사정권, 그리고 장제스를 군인정치가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장제스는 1887년(청 광서(光緖) 13년) 10월, 저장성 펑화현 씨코우진(浙江省 奉化縣 溪口鎭)에서 부유한 소금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의 사숙에서 유교경전 교육을 받았으며 16세 때인 1903년부터 고향의 학당에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육군사관학교 예비학교인 진무(振武)학교에 들어갔으며 1910년 12월 니이가타(新潟)현 타카다(高田)에 있는 일본육군 포병부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였다. 어릴 때 받은 유교 교육과 일본에서의 엄격한 군사훈련은 이후 장제스의 정치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가 존경하는 인물로서 왕양명과 쩡꾸오판(曾國藩)을 들고 있다거나 1930년대에 그가 주도한 신생활운동이 유교적 덕목을 목표로 하는 국민적 훈련을 내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 유학 시절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면서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 혁명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 장제스는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곧바로 귀국하여 천치메이(陳其美)를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上海), 저장(浙江) 지역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다. 이후 군사적 능력에 대한 신임을 얻어 쑨원의 측근으로 자리 잡았으며 1924년 소련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황푸(黃埔)군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됨으로써 이후 전개된 국민혁명군 조직과 군벌 군대를 상대로 한 북벌(北伐) 전쟁을 통하여 1928년 전국을 통일하고 난징(南京)국민정부를 수립, 그 주석에 취임하였다.
제일차 국공합작 초기부터 군사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싸고 소련 고문 및 중국공산당 측과 마찰을 빚고 있던 장제스는 1926년 3월의 중산함사건(中山艦事件)을 통하여 자신의 반공적 입장을 노골화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4월 북벌군의 상하이 난징 지역 점령 이후 공산당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소탕작전(4‧12정변)을 벌이면서 반공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소련 및 공산당과의 결별(分共)을 선언하였다. 이후 제이차북벌을 통하여 베이징(北京)을 점령하고, 동북을 장악하고 있던 장쉐량(張學良)의 국민당에의 복속(易幟) 선언을 마지막으로 전국적인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난징국민정부)를 건설하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1928년 이후부터 전개된 공산당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토벌작전(剿共)은 공산당 세력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9‧18사변)의 발발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 앞에 내전의 정지와 일치항일을 요구하는 국민적 저항(1936년 12월, 西安事變)에 직면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받아들이면서 제이차 국공합작이 전개되었다. 1937년 이후 8년간에 걸친 일본과의 전면전을 전개하였으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참전과 지원으로 1945년 항일전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항일전 종전 후인 1946년부터 본격화된 국공 간의 내전(國共內戰)에서 패한 장제스와 국민당정권은 1949년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중국현대사의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의 하나인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국민정부가 패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국민당 군대 및 관료들의 심각한 부패와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에서의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경제 정책의 파탄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다. 그와 동시에 공산당의 일치항일 주장이 많은 지식인층의 지지를 얻었고 점령지에 대한 토지개혁 실시와 그로 인한 농민층의 광범한 지지를 얻었던 것이 또 다른 중요 원인으로 꼽힌다.
1949년 이후 전개된 장제스의 타이완 통치는 군사적 억압통치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어서 국민적 저항(1947년 2‧28사건), 비판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권위주의적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개발독재를 통해 이루어진 타이완의 급속한 경제 발전은 긍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2. 『장제스일기』의 공개와 장제스 연구 붐
장제스(1887-1975)는 평생 일기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1917년부터 1972년에 걸쳐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일기용 노트에 붓으로 쓴 방대한 양의 『장제스일기』는 장제스 개인의 활동이나 사상 등을 잘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물, 정치적 사건 등에 관한 상세한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중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일차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장제스일기』의 원본은 오랜 기간 동안 대륙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1949년 타이완 패퇴와 함께 타이완으로 옮겨졌는데 국민당이 타이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에 두 번째로 패한 다음 해인 2005년, 후손들(손자며느리 장팡즈이, 蔣方智怡)에 의해 미국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에 위탁, 소장되었다. 후버연구소에서는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2006년부터 『장제스일기』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장제스일기』를 보기 위하여 대륙과 타이완, 일본, 유럽 등 전 세계의 학자들이 후버연구소에 모여들 만큼 『장제스일기』의 개방은 당시 전 세계 중국현대사 학계에 가장 뜨거운 뉴스였다. 필자도 2006년 여름부터 2007년 여름까지 1년의 안식년을 스탠포드에서 보냈는데 당시 『장제스일기』를 보는 것만큼이나 각국의 연구자들과 교류하는 즐거움 또한 컸던 기억이 새롭다.
2006년 후버연구소에서 원본 일기가 공개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마침 대륙과 대만의 정치적 관계가 크게 개선되면서 대륙 학계에서 장제스 연구는 바야흐로 커다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2006년 여름 난징(南京)대학 중화민국사연구센터 주최의 중화민국사연토회(中華民國史硏討會)가 장제스의 고향 펑화(奉化)에서 열린 것을 필두로 대륙과 타이완, 일본, 미국 등 곳곳에서 장제스를 주제로 하는 회의가 봇물을 이루었고 저장대학 장제스연구소(浙江大學 蔣介石與近代中國硏究所)를 비롯한 전문 연구소들이 만들어지는 한편으로 관련 서적들도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의 양티엔스(楊天石)교수를 중심으로 한 중화민국사 연구실에서는 연구원들을 차례로 스탠포드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전체 일기를 필사, 타자하여 장제스일기 디지털판을 만들고 이것을 기초로 집중적인 연구를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냈다. 또 저장대학 장제스연구소에서도 항저우(杭州) 지역 기업의 협찬을 받아 매년 장제스를 주제로 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전국의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참가자를 공모해 여름 캠프를 운영하였으며 “장제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 디지털화하기 시작하였다.
『장제스일기』의 공개를 계기로 전개된 장제스 연구 붐은 대륙과 타이완, 양안 간의 학술교류를 크게 진작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 많은 대륙 학자들이 타이완을 방문하여 국민당 당사회(黨史會)와 국사관(國史館)을 비롯한 타이완의 장제스 관련 자료 소장기관들을 찾았고 다양한 학술대회가 양측에서 경쟁하듯 열렸다. 그 결과로 장제스의 정치‧군사‧외교‧사상 등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으며 이를 토대로 장제스에 대한 기왕의 평가들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몇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개혁개방 이전까지 인민의 적, 매국적 반동적 독재자로 굳어져 있던 대륙의 장제스 평가는 날로 바뀌어 ‘항일전의 영웅’, ‘구국의 지도자’라는 평가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 반면에, 타이완에서는 장제스의 실제 면모들이 밝혀지면서 ‘노회한 독재적 군인정치가’의 면모가 더욱 강조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림 1] 장제스 일기 원본

3. 시진핑 시대의 사상통제와 장제스 연구의 침체
미국에서 일기가 공개된 이후 타이완 국사관에서는 2010년 『장제스일기』의 출판을 결정하고 관련 학술회의까지 조직했었다. 그러나 판권을 둘러싼 후손들 간의 법정 다툼이 벌어져 10여년 이상 계속되면서 출판은 계속 미뤄졌다. 그동안 타이완 정부 측의 다양한 노력과 법률적 조정을 거쳐 최근, 즉 2023년에 와서야 『장제스일기』 원본이 타이완 국사관으로 반환되어 왔으며 2023년 11월 국사관과 민국역사문화학사(民國歷史文化學社)에 의하여 출판이 시작되었다. 2025년 5월 현재까지, 1948년부터 1972년까지 기간에 해당하는 23권이 『장중정일기(蔣中正日記)』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2025년 말까지 1917년에서 1947년까지 시기의 일기가 출판되면 총 55권 분량의 전체 일기가 출판 완료될 예정이다.
그러나 그렇게 고대하던 『장제스일기』의 출판에도 불구하고 최근 중국 역사학계의 장제스 연구는 크게 위축되고 있다. 장제스 관련 각종 학술대회는 더 이상 열리지 못하고 있고 일부 군소 학술잡지를 제외하면 주요 학술잡지에서 장제스 관련 전문 논문을 찾기는 어려워졌다. 장제스를 전문으로 연구하던 학자들조차 거의 연구를 중단하거나 다른 연구 주제로 옮겨가고 있음도 확인된다. 간혹 다른 학술대회에서 이들을 만나면 매우 조심스럽게 더 이상 장제스 관련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는 비관적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대륙학계의 이러한 연구 위축 상황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작년 2024년 4월 『장제스일기』의 출판을 기념하여 타이베이(臺北)에서 열린 상당한 규모의 국제학술대회에 대륙 학자들이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필자의 질문에 대해, 주최(민국역사문화학사) 측에서는 2020년 총통 선거에 이어 2024년 총통 선거에서도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 후보(賴清德)가 당선되면서 양안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서 중국정부 측에서 참가를 금지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대륙학자들이 불참하게 된 일차적인 원인은 양안관계의 악화에 있다. 다만 그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2013년 시진핑(習近平) 체체 성립 이후, 특히 2018년 종신 주석제 개헌을 통하여 종신집권 체제를 만든 이후,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공산당 중심의 이념 사상 교육 강화와 언론 출판에 대한 대대적인 통제 정책이 있다.
시진핑 체제 아래 이념 교육의 강화와 언론 및 사상 통제의 실상과 그 문제점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여기서는 역사학계의 동향에 한정해서 눈에 띠는 대목만 짚어보자면, 장제스의 활동이 포함되어 있는 중화민국사 연구의 경우 전체적인 발표, 논문게재가 크게 줄어들고 그 대신에 같은 시기의 중국공산당의 활동과 관련된 연구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21년이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변화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일부 대륙 학자들의 표현을 들자면 민국사 연구를 고사시키려는 정책으로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배후에는 학술연구비 지원에 대한 편향적 정책과 논문 심사를 둘러싼 강력한 통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논문 발표뿐만 아니라 저서의 출판을 둘러싼 과도한 심사 개입으로도 나타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공산당사 중심의 연구를 강조하려는 통제 정책은, 대학에서의 마르크스, 마오쩌둥, 시진핑 사상 중심의 이념교육 강화로도 잘 드러나고 있다. 2012년 이후 각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학원(단과대학)이 대거 신설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념 교육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한때 취업난을 겪고 있던 젊은 역사학 박사 학위자들이 신설 마르크스주의학원에 대거 취업하면서 진로에 숨통이 트였다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개별성과 다양성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 세대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이념 교육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지만 역사학자들 내부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이념 위주의 교육과 일방적인 연구 풍토 조성에 대해 적지 않은 반발이 일어나고 있음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시진핑체제 하의 이러한 사상 이념 통제 속에서의 역사학의 변화에는 보다 근본적으로 2000년 이후 세계 최대 열강(G2)으로 도약하면서 자신감에 넘친 중국공산당이 서구식 근대화를 기반으로 하는 역사 발전론을 더 이상 표준으로 삼기를 거부하면서 이른바 “신시대 중국문명”의 건설을 내세우고 그에 맞추어 중국 특색의 자주적 지식체계로서의 역사학을 만들고자 하는 주장이 들어 있다.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시도의 결과가 어떨는지 쉽게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다변화 다양화 개성화를 기반으로 삼는 특히 젊은 세대들의 지향과는 쉽게 어울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이런 이유에서 대륙에서의 장제스 연구는 중국 역사학계의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풍향계로서뿐만 아니라 이념적 지향을 포함하는 중국 사회 내부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풍향계로서 주목해야 할 대목임은 분명하다.
< 2025. Vol. 19
중국 역사학의 풍향계
장제스(蔣介石) 연구 어디로 가나?
현 중국저장대학 장제스연구소 객좌교수, 전 신라대학 사학과 교수 배경한
1. 장제스와 현대중국
20세기 전반기 중국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로 장제스를 꼽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왕조가 멸망한 다음 새로운 국가체제(국민국가)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1920년대의 국민혁명을 통하여 장제스는 군사적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며 전국적 지도자로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장제스는 1928년에 만들어진 난징(南京) 국민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며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당 군대에 패하여 타이완(臺灣)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대륙의 최고 정치지도자였다. 장제스는 국가 주석이나 행정원장, 외교부장, 국민당 총재 등 다양한 직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최고 권력을 유지시켜준 핵심 지위는 최고의 군사권을 가지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난징 국민정부를 군사정권, 그리고 장제스를 군인정치가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장제스는 1887년(청 광서(光緖) 13년) 10월, 저장성 펑화현 씨코우진(浙江省 奉化縣 溪口鎭)에서 부유한 소금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의 사숙에서 유교경전 교육을 받았으며 16세 때인 1903년부터 고향의 학당에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육군사관학교 예비학교인 진무(振武)학교에 들어갔으며 1910년 12월 니이가타(新潟)현 타카다(高田)에 있는 일본육군 포병부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였다. 어릴 때 받은 유교 교육과 일본에서의 엄격한 군사훈련은 이후 장제스의 정치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가 존경하는 인물로서 왕양명과 쩡꾸오판(曾國藩)을 들고 있다거나 1930년대에 그가 주도한 신생활운동이 유교적 덕목을 목표로 하는 국민적 훈련을 내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 유학 시절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면서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 혁명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 장제스는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곧바로 귀국하여 천치메이(陳其美)를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上海), 저장(浙江) 지역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다. 이후 군사적 능력에 대한 신임을 얻어 쑨원의 측근으로 자리 잡았으며 1924년 소련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황푸(黃埔)군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됨으로써 이후 전개된 국민혁명군 조직과 군벌 군대를 상대로 한 북벌(北伐) 전쟁을 통하여 1928년 전국을 통일하고 난징(南京)국민정부를 수립, 그 주석에 취임하였다.
제일차 국공합작 초기부터 군사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싸고 소련 고문 및 중국공산당 측과 마찰을 빚고 있던 장제스는 1926년 3월의 중산함사건(中山艦事件)을 통하여 자신의 반공적 입장을 노골화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4월 북벌군의 상하이 난징 지역 점령 이후 공산당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소탕작전(4‧12정변)을 벌이면서 반공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소련 및 공산당과의 결별(分共)을 선언하였다. 이후 제이차북벌을 통하여 베이징(北京)을 점령하고, 동북을 장악하고 있던 장쉐량(張學良)의 국민당에의 복속(易幟) 선언을 마지막으로 전국적인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난징국민정부)를 건설하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1928년 이후부터 전개된 공산당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토벌작전(剿共)은 공산당 세력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9‧18사변)의 발발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 앞에 내전의 정지와 일치항일을 요구하는 국민적 저항(1936년 12월, 西安事變)에 직면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받아들이면서 제이차 국공합작이 전개되었다. 1937년 이후 8년간에 걸친 일본과의 전면전을 전개하였으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참전과 지원으로 1945년 항일전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항일전 종전 후인 1946년부터 본격화된 국공 간의 내전(國共內戰)에서 패한 장제스와 국민당정권은 1949년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중국현대사의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의 하나인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국민정부가 패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국민당 군대 및 관료들의 심각한 부패와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에서의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경제 정책의 파탄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다. 그와 동시에 공산당의 일치항일 주장이 많은 지식인층의 지지를 얻었고 점령지에 대한 토지개혁 실시와 그로 인한 농민층의 광범한 지지를 얻었던 것이 또 다른 중요 원인으로 꼽힌다.
1949년 이후 전개된 장제스의 타이완 통치는 군사적 억압통치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어서 국민적 저항(1947년 2‧28사건), 비판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권위주의적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개발독재를 통해 이루어진 타이완의 급속한 경제 발전은 긍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2. 『장제스일기』의 공개와 장제스 연구 붐
장제스(1887-1975)는 평생 일기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1917년부터 1972년에 걸쳐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일기용 노트에 붓으로 쓴 방대한 양의 『장제스일기』는 장제스 개인의 활동이나 사상 등을 잘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물, 정치적 사건 등에 관한 상세한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중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일차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장제스일기』의 원본은 오랜 기간 동안 대륙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1949년 타이완 패퇴와 함께 타이완으로 옮겨졌는데 국민당이 타이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에 두 번째로 패한 다음 해인 2005년, 후손들(손자며느리 장팡즈이, 蔣方智怡)에 의해 미국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에 위탁, 소장되었다. 후버연구소에서는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2006년부터 『장제스일기』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장제스일기』를 보기 위하여 대륙과 타이완, 일본, 유럽 등 전 세계의 학자들이 후버연구소에 모여들 만큼 『장제스일기』의 개방은 당시 전 세계 중국현대사 학계에 가장 뜨거운 뉴스였다. 필자도 2006년 여름부터 2007년 여름까지 1년의 안식년을 스탠포드에서 보냈는데 당시 『장제스일기』를 보는 것만큼이나 각국의 연구자들과 교류하는 즐거움 또한 컸던 기억이 새롭다.
2006년 후버연구소에서 원본 일기가 공개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마침 대륙과 대만의 정치적 관계가 크게 개선되면서 대륙 학계에서 장제스 연구는 바야흐로 커다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2006년 여름 난징(南京)대학 중화민국사연구센터 주최의 중화민국사연토회(中華民國史硏討會)가 장제스의 고향 펑화(奉化)에서 열린 것을 필두로 대륙과 타이완, 일본, 미국 등 곳곳에서 장제스를 주제로 하는 회의가 봇물을 이루었고 저장대학 장제스연구소(浙江大學 蔣介石與近代中國硏究所)를 비롯한 전문 연구소들이 만들어지는 한편으로 관련 서적들도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의 양티엔스(楊天石)교수를 중심으로 한 중화민국사 연구실에서는 연구원들을 차례로 스탠포드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전체 일기를 필사, 타자하여 장제스일기 디지털판을 만들고 이것을 기초로 집중적인 연구를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냈다. 또 저장대학 장제스연구소에서도 항저우(杭州) 지역 기업의 협찬을 받아 매년 장제스를 주제로 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전국의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참가자를 공모해 여름 캠프를 운영하였으며 “장제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 디지털화하기 시작하였다.
『장제스일기』의 공개를 계기로 전개된 장제스 연구 붐은 대륙과 타이완, 양안 간의 학술교류를 크게 진작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 많은 대륙 학자들이 타이완을 방문하여 국민당 당사회(黨史會)와 국사관(國史館)을 비롯한 타이완의 장제스 관련 자료 소장기관들을 찾았고 다양한 학술대회가 양측에서 경쟁하듯 열렸다. 그 결과로 장제스의 정치‧군사‧외교‧사상 등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으며 이를 토대로 장제스에 대한 기왕의 평가들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몇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개혁개방 이전까지 인민의 적, 매국적 반동적 독재자로 굳어져 있던 대륙의 장제스 평가는 날로 바뀌어 ‘항일전의 영웅’, ‘구국의 지도자’라는 평가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 반면에, 타이완에서는 장제스의 실제 면모들이 밝혀지면서 ‘노회한 독재적 군인정치가’의 면모가 더욱 강조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림 1] 장제스 일기 원본
3. 시진핑 시대의 사상통제와 장제스 연구의 침체
미국에서 일기가 공개된 이후 타이완 국사관에서는 2010년 『장제스일기』의 출판을 결정하고 관련 학술회의까지 조직했었다. 그러나 판권을 둘러싼 후손들 간의 법정 다툼이 벌어져 10여년 이상 계속되면서 출판은 계속 미뤄졌다. 그동안 타이완 정부 측의 다양한 노력과 법률적 조정을 거쳐 최근, 즉 2023년에 와서야 『장제스일기』 원본이 타이완 국사관으로 반환되어 왔으며 2023년 11월 국사관과 민국역사문화학사(民國歷史文化學社)에 의하여 출판이 시작되었다. 2025년 5월 현재까지, 1948년부터 1972년까지 기간에 해당하는 23권이 『장중정일기(蔣中正日記)』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2025년 말까지 1917년에서 1947년까지 시기의 일기가 출판되면 총 55권 분량의 전체 일기가 출판 완료될 예정이다.
그러나 그렇게 고대하던 『장제스일기』의 출판에도 불구하고 최근 중국 역사학계의 장제스 연구는 크게 위축되고 있다. 장제스 관련 각종 학술대회는 더 이상 열리지 못하고 있고 일부 군소 학술잡지를 제외하면 주요 학술잡지에서 장제스 관련 전문 논문을 찾기는 어려워졌다. 장제스를 전문으로 연구하던 학자들조차 거의 연구를 중단하거나 다른 연구 주제로 옮겨가고 있음도 확인된다. 간혹 다른 학술대회에서 이들을 만나면 매우 조심스럽게 더 이상 장제스 관련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는 비관적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대륙학계의 이러한 연구 위축 상황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작년 2024년 4월 『장제스일기』의 출판을 기념하여 타이베이(臺北)에서 열린 상당한 규모의 국제학술대회에 대륙 학자들이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필자의 질문에 대해, 주최(민국역사문화학사) 측에서는 2020년 총통 선거에 이어 2024년 총통 선거에서도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 후보(賴清德)가 당선되면서 양안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서 중국정부 측에서 참가를 금지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대륙학자들이 불참하게 된 일차적인 원인은 양안관계의 악화에 있다. 다만 그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2013년 시진핑(習近平) 체체 성립 이후, 특히 2018년 종신 주석제 개헌을 통하여 종신집권 체제를 만든 이후,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공산당 중심의 이념 사상 교육 강화와 언론 출판에 대한 대대적인 통제 정책이 있다.
시진핑 체제 아래 이념 교육의 강화와 언론 및 사상 통제의 실상과 그 문제점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여기서는 역사학계의 동향에 한정해서 눈에 띠는 대목만 짚어보자면, 장제스의 활동이 포함되어 있는 중화민국사 연구의 경우 전체적인 발표, 논문게재가 크게 줄어들고 그 대신에 같은 시기의 중국공산당의 활동과 관련된 연구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21년이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변화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일부 대륙 학자들의 표현을 들자면 민국사 연구를 고사시키려는 정책으로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배후에는 학술연구비 지원에 대한 편향적 정책과 논문 심사를 둘러싼 강력한 통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논문 발표뿐만 아니라 저서의 출판을 둘러싼 과도한 심사 개입으로도 나타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공산당사 중심의 연구를 강조하려는 통제 정책은, 대학에서의 마르크스, 마오쩌둥, 시진핑 사상 중심의 이념교육 강화로도 잘 드러나고 있다. 2012년 이후 각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학원(단과대학)이 대거 신설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념 교육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한때 취업난을 겪고 있던 젊은 역사학 박사 학위자들이 신설 마르크스주의학원에 대거 취업하면서 진로에 숨통이 트였다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개별성과 다양성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 세대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이념 교육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지만 역사학자들 내부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이념 위주의 교육과 일방적인 연구 풍토 조성에 대해 적지 않은 반발이 일어나고 있음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시진핑체제 하의 이러한 사상 이념 통제 속에서의 역사학의 변화에는 보다 근본적으로 2000년 이후 세계 최대 열강(G2)으로 도약하면서 자신감에 넘친 중국공산당이 서구식 근대화를 기반으로 하는 역사 발전론을 더 이상 표준으로 삼기를 거부하면서 이른바 “신시대 중국문명”의 건설을 내세우고 그에 맞추어 중국 특색의 자주적 지식체계로서의 역사학을 만들고자 하는 주장이 들어 있다.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시도의 결과가 어떨는지 쉽게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다변화 다양화 개성화를 기반으로 삼는 특히 젊은 세대들의 지향과는 쉽게 어울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이런 이유에서 대륙에서의 장제스 연구는 중국 역사학계의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풍향계로서뿐만 아니라 이념적 지향을 포함하는 중국 사회 내부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풍향계로서 주목해야 할 대목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