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도시로 새로운 동아시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부산대학교 김동규
근대 초기 동아시아는 서구 식민/제국주의라는 충격에 이어 일본 식민/제국주의라는 이중의 충격을 동시에 겪었다. 뒤이어 냉전과 탈냉전 또는 신냉전을 거치면서, 다양한 지구적-지역적 모순을 겪었다. 아시아는 갈가리 찢겼고, 치명적 상처를 서로 주고받았다. 이 복잡한 폭력의 흔적을 관문도시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새기고 있다. 관문도시는 동아시아의 모순을 물리적으로 응축한 결정체이자 동아시아에 작동하던 폭력을 새긴 표현물이다. 그러므로 관문도시를 읽는 것은 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읽는 것이며, 관문도시를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관문도시를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진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서발터니티(subalternity)라는 방법을 생각한다. 서발터니티라는 개념은 서발턴에서 유래했다. 우선 서발턴이라는 개념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들의 특성을 지시한다. 아울러 그런 존재를 생산한 구체적인 장소성을 지시한다. 이후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상들이 그와 유사하지만 다른 특성이 강조된 개념들을 생산했다. 그것이 비체(abject), 소수자, 몫이 없는 자, 크레올, 호모 사케르 등이다.1)
서발터니티라는 방법이 비판적 진단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비판의 그리스 어원에 따르면 진단과 치료를 중심으로 했던 의학에서 비롯되었다. 특정 존재가 겪던 생존의 위기(crisis)를 극복하기 위한 진단이 바로 비판이다. 비판(critic)이 위기와 어원이 같은 이유다. 이런 비판은 대개 ‘주체 중심’적이다. 칸트와 하버마스는 비판의 두 특징으로 한계로서의 비판과 경계로서의 비판을 제시했다. 한계로서 비판은 주체의 자기 점검의 지극(至極)한 차원을 말한다. 이와 달리 경계로서 비판은 주체들 간(間)의 상호 점검을 말한다.
하지만 주체의 자격을 애초에 박탈당한 존재는 한계로서 비판이나, 경계로서 비판을 수행할 수 없다. 오히려 극도로 치명적인 자신의 상황을 노출함으로써, 주체의 부정의와 부당함, 그리고 주체의 폭력을 ‘자각’하게 만드는 ‘긴장감’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이조차도 희미하고 미약하며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이동권과 생존권 투쟁을 하던 최옥란이 언제나 자살을 할 극약을 주머니에 들고 다녔던 일, 중증장애인의 문제를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라는 문장으로 표현한 어느 시2) 의 육중한 표현 앞에서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우리 자신이자, 우리가 고안하거나 찬성한 시스템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 취약한 존재들이 제기하는 자각의 비판을 나는 ‘임계적 비판’이라고 부른다. 임계적 비판은 취약한 존재들의 부름에 주체가 반응한 응답(responsibility)이다. 서발터니티의 취약한 위력은 책임적 주체의 임계적 자각(비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힘을 발휘한다.3)
관문도시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계적 특성 때문에, 언제나 서발터니티와 먼저 만나게 된다. 관문도시는 말 그대로 한 국가로 진입하고, 한 국가 밖으로 진출하기 위한 국가의 문(gate)이다. 게오르그 짐멜에 따르면 문은 닫으면 벽이 되고, 열면 길이 된다.4) 선택에 따라 벽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하는 문의 역학이 관문도시에 작동한다. 한 국가의 최외곽이자 최전선인 관문도시는 일종의 아방가르드 도시(前衛都市)다. 개방적 실험이나 폐쇄적 보호라는 극단의 정치 역학이 여기서 작동한다. 관문도시의 정치 역학이 흔히 보수와 진보의 극단을 오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관문도시는 한편으로 새로운 것의 유입을 실험하고, 그 안정성이 확보되면 국가 전체에 그 새로움을 전달하는 힘을 가질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것이 위험하다 판단되면, 즉각 문을 닫아걸고 국가 전체에 퍼질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심지어 개/폐의 결정이 관문도시의 자율성이 상실된 채 진행될 수도 있다. 식민/제국의 경험이 그러한데, 동아시아 관문도시는 모두 이런 상흔을 새기고 있다. 동아시아 관문도시에는 위험할 것이라 상상된 공포와 과거 실현되었던 공포의 기억이 뒤엉켜 복잡한 위기의식을 드러낸다. 이런 위기의식에 입각한 공포는 일단 경험하기 전까지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경험하기 전에 경험할 것으로 상상된 공포는 ‘허구적’이다. 하지만 이 허구가 꽤 현실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 공포를 빌미로 폭력을 관철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한 예방적 폭력이 그렇다.
사카이 다카시는 “정상적인 공포는 아프리카 정글 한 가운데서 뱀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비정상의 공포란 도시 한 가운데의 자기 집 카펫 밑에 뱀이 있을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5) 이에 더하여 약한 쪽이 일으킬 폭력을 ‘예상’하고 두려워하여 강한 쪽이 오히려 약한 쪽에 치명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있다. 이를 상상적 전도(imaginary inversion)라고 한다.
이때도 폭력은 ‘허구적 공포’를 통해 작동한다. 백인이 황화(Yellow peril)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거나, 흑인 남성으로부터 백인 여성을 지켜야 한다는 인종적 혐오에 기반을 둔 공포도 이렇게 작동했다.6) 이때 폭력의 역설이 발생한다. 발생할 것 같은 폭력을 저지하기 위해 폭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전쟁은 근본적으로 반전이다.”라는 역설적 명제도 여기서 등장한다. 소위 자위권 발동이라는 명목으로 소수자나 약자를 가해하는 폭력이 이런 역설에 해당한다.7) 관문도시가 ‘질서’나 ‘안전’을 목적으로 이런 폭력을 작동시킬 때, 가장 치명적인 존재가 바로 서발터니틱한 존재들이다.
앞서 언급했던 서발터니티라는 개념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서발터니티는 주체에도 객체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 처한 존재의 특성을 종합한 개념이다. 존재론적으로는 부재 처리된 존재, 의미론적으로는 무의미 또는 혼종적 의미, 인식론적으로는 감지될 수 없는 존재 등, 기존 체계가 정상으로 간주한 범위에서 이탈한 모든 개념을 종합한 개념이다.8) 그런 서발터니티는 서발터니틱한 존재를 생산한 지역의 장소성을 새기고 있다. 자신들을 격리하고 배제했던 부당한 폭력에 대한 흔적을 지정학적으로 새겨두고 있는 것이다. 관문도시가 드라마틱하게 새겨둔 폭력의 흔적이 바로 이 서발터니티를 향한 폭력에서 절정을 이룬다. 서발터니틱한 존재들의 치명적 상황을 해설하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동아시아 관문도시의 문제를 독해해보자.
일본에서 취약했던 여성이 일본 내 성매매 여성이 되었다가, 이를 통해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관문도시를 거쳐 싱가폴로 이주하여 정착한 적이 있다. 1914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에 사는 30만 일본인 중 성매매여성은 2만2천 명 정도 되었다. 이들은 일본 시골의 가난 때문에 성매매에 내몰렸다. 당시 도항에 여권이 필요하지 않았고, 대부분 국가가 여권 제도를 운용하지도 않았기에 이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동아시아 해역을 떠돌았다. 가명이나 별명을 사용했기에 이들에 대한 통계를 정식으로 잡기도 어렵다. 동아시아에서 유동하던 이들은 대개 통계상 부재하는 존재들이었다. 에노모토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외화벌이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들의 열악한 생활을 오히려 부추긴 바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기록에도 이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9)
1896년 싱가폴 거주 총 1000명의 일본인 중 900명이 성매매 여성이었다. 이후 일본인들 상인과 사람들이 싱가폴에 대거 정착하자, 성매매 여성들은 이들에 의해 다시 추방되어, 대만과 중국 그리고 한국으로 흘러들게 된다. 1910년대 싱가폴은 동남아 전역으로 가라유키를 유통시키던 중심지였다.10) 싱가폴 역시 관문도시다.
1910년 대만에는 16곳의 유곽이 정비되었다. 그 중에서도 마꿍은 1945년까지 대만서 가장 성매매가 번성한 지역이었는데, 그 이유는 펑후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병참기지화, 군사요새화, 제국의 남진을 도모하는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대규모 군사력이 있었다는 것은 그 이면에 대규모 성매매가 성행했다는 사실로 연결된다. 이 문제로 발생할 성병의 통제를 위해 대만은 공창제를 도입한다. 당시 대만 본토에는 인구수 비례 공창을 도입했지만, 펑후는 인구수와 무관하게 공창제를 도입했다.11)
1896까지는 일본 민간인이 대만을 왕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로 대만 여성이 성매매를 하게 되었는데, 이후 민간인에게 대만 도항이 허가되자, 대만여성이 일본여성으로 대체되기도 했다.12) 이런 관성이 이후 일본인의 대만 매춘 관광 산업으로 확장되고, 일본과 대만의 수교가 단절되자, 일본은 한국으로 매춘 관광을 오게 된다. 한국의 부산에는 완월동이 있었다. 덕분에 완월동은 동양최대 성매매 집결지가 된다.
한센인의 사례도 일본-한국-대만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대만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현실을 공히 겪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과 대만은 서양선교사들이 먼저 한센인 요양소 설치했다는 점이 유사하다. 이는 일본의 경우 관공립 요양소가 많았던 반면, 조선과 대만은 관립(국립) 요양소는 하나뿐이었다는 점도 그렇다. 이는 일본 제국의 권력과, 서양의 권력이 식민지 개척을 놓고 서로 견제 관계에 있었음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식 강제 격리 정책을 따르다가, 상대적 격리로 전환한 반면, 대만은 일본의 절대적 격리 체제를 충실히 따라간다. 동아시아 해역에서 서발터니티는 이토록 권력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만큼 그 권력을 반영했다.13)
이처럼 관문도시와 서발터니틱한 존재들은 긴밀한 연관이 있다. 기록되고 보이지 않던 그들이 늘 먼저 있었다. 그리고 권력은 ‘안전’을 빌미로 그들을 치명적 상황으로 내 몰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으로 삼는 데 가차 없었다. 관문도시는 이 배제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내밀린 서발터니티 이면에 전복의 힘이 도사리고 있다. 미-비-불(未-非-不)의 존재로서 서발터니티가 비록 배제, 낙인, 추방이라는 겹겹의 부재처리로 인해, 기존 폭력을 스스로 감내하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만큼 이면에 자신을 부재 처리한 존재의 폭력을 폭로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 나는 이 힘을 ‘임계적 공공성’이라 표현한다. 문제는 그 전복의 힘이 특유의 취약성으로 인해 제대로 발휘되거나 응답받을 여지를 얻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발터니틱한 존재’는 이런 비극적 상황을 상례로 여기며 살 수 밖에 없다. 서발터니틱한(subalternitic) 삶은 언제든 생사여탈의 상황에 빠질 수 있다.14) 벤야민이 언급한 예외상태가 상례가 되었다는 언급을 생각하면, 이런 위기는 특정한 삶만이 겪는 위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서발터니틱한 존재와 이들의 피해는 우리 삶 전반이 부당함을 증언하는 생의 경종이라 하겠다. 그 경종을 고병권은 이렇게 표현했다. “장애인 한 명이 마음 편하게 출근길 버스를 타려면 사회의 기본 이념과 체제를 몽땅 바꾸어야 한다.”15) 우리는 이 문장에서 사용된 몇 가지 말에 주목해야 한다. ‘기본’이라는 말과 ‘몽땅’이라는 말, 그리고 그냥 ‘버스’가 아니라 ‘출근길’ 버스라는 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장애인들은 너무나 쉽고 간편하게 ‘출근하지 않는 시간의 버스’를 상상한다. 취약한 존재의 치명적 삶에 근본적이고 전복적인 힘이 내재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매매 여성과 한센인 역시 동아시아 관문도시를 이동하면서 또는 특정 도시에 감금된 채 온몸으로 국가의 폭력과 초국가적 폭력을 드러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다양한 장소(지역-도시-국가-아시아-지구)의 폭력을 폭로한 것이다. 나는 그 이면에 서구중심의 가부장주의(Occidental paternalism)가 도사리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아울러 이 메타 구조 때문에 논리적으로 결부될 수 없을 정도로 독립적인 두 체계(국가 체계와 시장 체계)가 서로 공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공모의 최 외곽에 바로 서발터니틱한 존재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관문도시는 그런 존재를 향한 폭력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새기고 있다.
최근 이런 문제를 다루는 두 책이 조만간 출간된다. 그 중 하나는 동아시아 관문도시 읽기고, 다른 하나는 『근대 동아시아 국가와 도시, 서발터니티 존재들』이다. 이 두 책은 관문도시를 독해할 때, 가장 취약한 존재(the subalternitic)도 떠올려 보라고 제안한다. 이 두 책은 동아시아 관문도시를 독해할 때, 우리가 거주하는 구체적 장소에서 서발터니틱한 존재들에 가해지는 폭력에 민감해지라고 한다. 그리고 그 유사한 폭력이 동아시아의 다른 관문도시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다는 것도 상기하기를 바란다. 이 두 개념 쌍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이처럼 동일한 폭력을 행사한 거대한 이면의 실체를 응시할 수 있고, 새로운 평화를 동아시아에 불러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평화는 바로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서발터니틱한 존재를 환대(hospitality)하는 일이다. 그 희미한 절규에 응답(response)할 수 있음(ability)이 동아시아 기존 주체의 책임(responsibility)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들을 배제하는 데 암묵적/명시적으로 동의하며 지내왔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들을 환대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우리가 딛고 있는 물리적/비물리적 지평을 전적으로 쇄신하는 일이다. 기득권자와 주체의 자리를 스스로 뒤엎고 이들을 영접(hospitality)하는 일이 ‘레비나스’가 언급했던 환대의 급진성이었다.
이 급진성은 내가 자리하고 있는 장소, 특히 국가라는 프레임을 넘어 장소와 장소, 관문도시와 관문도시 사이의 새로운 연대를 촉구하는 일로 확산될 수 있다. 나는 이처럼 취약한 존재들에 대한 응답에서 출발하는 연대로 동아시아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연대라는 가능성을 감히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출발이 동아시아에서 치명적 폭력을 겪던 존재들을 환대하는 일이다. 이 환대를 통해 동아시아 ‘관문도시’를 새롭게 독해하는 일이 이어져야 한다. 나아가 동아시아 각 관문도시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의 긴장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기존 국가 중심적 동아시아 해석을 넘어서 생사여탈의 위기에 처한 존재들을 살리는 일이다. 이를 통해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더 격해지기만 하는 국가 간의 혐오와 대결을 넘어갈 새로운 힘에 주목할 수 있다. 새로운 동아시아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나는 카프카의 짧은 소설 「돌연한 출발」을 상상한다.
1) 서발터니티라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 김동규, 2023, 「서발터니티라는 방법」, 「인문사회과학연구」 제24권 제3호.
2) 문인수 시인의 <이것이 날개다>라는 시의 한 구절
3) 한계, 경계, 임계로서 비판에 대해서는 김동규, 「임계의 철학: 잠재성의 의미론」, 「철학연구」 171집, 대한철학회, 2024, 52쪽 참고.
4) 게오르그 짐멜(김덕영 외 역),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서울, 2005, 265-270쪽 참고.
5) 사카이 다카시(김은주 역), 「폭력의 철학: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산눈, 2007, 113쪽.
6) 위의 책, 119쪽, 121쪽 참고.
7) 위의 책, 124쪽 참고 또는 인용.
8) 김동규, 2023, 「서발터니티라는 방법」, 「인문사회과학연구」 제24권 제3호, 383-392쪽.
9) Sookyeong Hong, 2018, “Toward a Gentleman’s Overseas Community: the Abolition of Japanese Brothels in Singapore, 1910 1920”,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제19호, pp. 48-49 참고.
10) 위의 논문, pp. 45-47 참고.
11) 대만의 사례와 유사하게 부산의 성매매 문제도 군사도시화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전성현, 2018을 참고.
12) 진정원, 2016, 「일제 초기 대만의 마꿍 유곽 설치 과정 연구(1896-1913)」, 사회와 역사 110집, 281-295쪽 참고.
13)정근식, 2002, 「동아시아 한센병사 연구를 위하여」, 「보건과 사회과학」 제12집, 17쪽, 34쪽 참고. 또는 김동규, 2025, 「한센인, 서발터니티(subalternity)의 지정학: 부산의 경우」, 철학연구」, 105-130쪽 참고.
14) 이에 대해서는 김동규, 2023과 이홍규, 김동규, 2024, 「새로운 동아시아 담론을 위한 서설(序說): 방법으로서 관문도시와 동아시아 서발터니티」, 동아연구 제43권 1호(통권 86집)를 참고.
15)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4280300035 고병권, <장애해방 전선의 전사들>, <경향신문> 2023.04.28.
< 2025. Vol. 19
관문도시로 새로운 동아시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부산대학교 김동규
근대 초기 동아시아는 서구 식민/제국주의라는 충격에 이어 일본 식민/제국주의라는 이중의 충격을 동시에 겪었다. 뒤이어 냉전과 탈냉전 또는 신냉전을 거치면서, 다양한 지구적-지역적 모순을 겪었다. 아시아는 갈가리 찢겼고, 치명적 상처를 서로 주고받았다. 이 복잡한 폭력의 흔적을 관문도시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새기고 있다. 관문도시는 동아시아의 모순을 물리적으로 응축한 결정체이자 동아시아에 작동하던 폭력을 새긴 표현물이다. 그러므로 관문도시를 읽는 것은 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읽는 것이며, 관문도시를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관문도시를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진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서발터니티(subalternity)라는 방법을 생각한다. 서발터니티라는 개념은 서발턴에서 유래했다. 우선 서발턴이라는 개념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들의 특성을 지시한다. 아울러 그런 존재를 생산한 구체적인 장소성을 지시한다. 이후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상들이 그와 유사하지만 다른 특성이 강조된 개념들을 생산했다. 그것이 비체(abject), 소수자, 몫이 없는 자, 크레올, 호모 사케르 등이다.1)
서발터니티라는 방법이 비판적 진단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비판의 그리스 어원에 따르면 진단과 치료를 중심으로 했던 의학에서 비롯되었다. 특정 존재가 겪던 생존의 위기(crisis)를 극복하기 위한 진단이 바로 비판이다. 비판(critic)이 위기와 어원이 같은 이유다. 이런 비판은 대개 ‘주체 중심’적이다. 칸트와 하버마스는 비판의 두 특징으로 한계로서의 비판과 경계로서의 비판을 제시했다. 한계로서 비판은 주체의 자기 점검의 지극(至極)한 차원을 말한다. 이와 달리 경계로서 비판은 주체들 간(間)의 상호 점검을 말한다.
하지만 주체의 자격을 애초에 박탈당한 존재는 한계로서 비판이나, 경계로서 비판을 수행할 수 없다. 오히려 극도로 치명적인 자신의 상황을 노출함으로써, 주체의 부정의와 부당함, 그리고 주체의 폭력을 ‘자각’하게 만드는 ‘긴장감’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이조차도 희미하고 미약하며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이동권과 생존권 투쟁을 하던 최옥란이 언제나 자살을 할 극약을 주머니에 들고 다녔던 일, 중증장애인의 문제를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라는 문장으로 표현한 어느 시2) 의 육중한 표현 앞에서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우리 자신이자, 우리가 고안하거나 찬성한 시스템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 취약한 존재들이 제기하는 자각의 비판을 나는 ‘임계적 비판’이라고 부른다. 임계적 비판은 취약한 존재들의 부름에 주체가 반응한 응답(responsibility)이다. 서발터니티의 취약한 위력은 책임적 주체의 임계적 자각(비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힘을 발휘한다.3)
관문도시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계적 특성 때문에, 언제나 서발터니티와 먼저 만나게 된다. 관문도시는 말 그대로 한 국가로 진입하고, 한 국가 밖으로 진출하기 위한 국가의 문(gate)이다. 게오르그 짐멜에 따르면 문은 닫으면 벽이 되고, 열면 길이 된다.4) 선택에 따라 벽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하는 문의 역학이 관문도시에 작동한다. 한 국가의 최외곽이자 최전선인 관문도시는 일종의 아방가르드 도시(前衛都市)다. 개방적 실험이나 폐쇄적 보호라는 극단의 정치 역학이 여기서 작동한다. 관문도시의 정치 역학이 흔히 보수와 진보의 극단을 오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관문도시는 한편으로 새로운 것의 유입을 실험하고, 그 안정성이 확보되면 국가 전체에 그 새로움을 전달하는 힘을 가질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것이 위험하다 판단되면, 즉각 문을 닫아걸고 국가 전체에 퍼질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심지어 개/폐의 결정이 관문도시의 자율성이 상실된 채 진행될 수도 있다. 식민/제국의 경험이 그러한데, 동아시아 관문도시는 모두 이런 상흔을 새기고 있다. 동아시아 관문도시에는 위험할 것이라 상상된 공포와 과거 실현되었던 공포의 기억이 뒤엉켜 복잡한 위기의식을 드러낸다. 이런 위기의식에 입각한 공포는 일단 경험하기 전까지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경험하기 전에 경험할 것으로 상상된 공포는 ‘허구적’이다. 하지만 이 허구가 꽤 현실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 공포를 빌미로 폭력을 관철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한 예방적 폭력이 그렇다.
사카이 다카시는 “정상적인 공포는 아프리카 정글 한 가운데서 뱀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비정상의 공포란 도시 한 가운데의 자기 집 카펫 밑에 뱀이 있을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5) 이에 더하여 약한 쪽이 일으킬 폭력을 ‘예상’하고 두려워하여 강한 쪽이 오히려 약한 쪽에 치명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있다. 이를 상상적 전도(imaginary inversion)라고 한다.
이때도 폭력은 ‘허구적 공포’를 통해 작동한다. 백인이 황화(Yellow peril)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거나, 흑인 남성으로부터 백인 여성을 지켜야 한다는 인종적 혐오에 기반을 둔 공포도 이렇게 작동했다.6) 이때 폭력의 역설이 발생한다. 발생할 것 같은 폭력을 저지하기 위해 폭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전쟁은 근본적으로 반전이다.”라는 역설적 명제도 여기서 등장한다. 소위 자위권 발동이라는 명목으로 소수자나 약자를 가해하는 폭력이 이런 역설에 해당한다.7) 관문도시가 ‘질서’나 ‘안전’을 목적으로 이런 폭력을 작동시킬 때, 가장 치명적인 존재가 바로 서발터니틱한 존재들이다.
앞서 언급했던 서발터니티라는 개념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서발터니티는 주체에도 객체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 처한 존재의 특성을 종합한 개념이다. 존재론적으로는 부재 처리된 존재, 의미론적으로는 무의미 또는 혼종적 의미, 인식론적으로는 감지될 수 없는 존재 등, 기존 체계가 정상으로 간주한 범위에서 이탈한 모든 개념을 종합한 개념이다.8) 그런 서발터니티는 서발터니틱한 존재를 생산한 지역의 장소성을 새기고 있다. 자신들을 격리하고 배제했던 부당한 폭력에 대한 흔적을 지정학적으로 새겨두고 있는 것이다. 관문도시가 드라마틱하게 새겨둔 폭력의 흔적이 바로 이 서발터니티를 향한 폭력에서 절정을 이룬다. 서발터니틱한 존재들의 치명적 상황을 해설하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동아시아 관문도시의 문제를 독해해보자.
일본에서 취약했던 여성이 일본 내 성매매 여성이 되었다가, 이를 통해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관문도시를 거쳐 싱가폴로 이주하여 정착한 적이 있다. 1914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에 사는 30만 일본인 중 성매매여성은 2만2천 명 정도 되었다. 이들은 일본 시골의 가난 때문에 성매매에 내몰렸다. 당시 도항에 여권이 필요하지 않았고, 대부분 국가가 여권 제도를 운용하지도 않았기에 이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동아시아 해역을 떠돌았다. 가명이나 별명을 사용했기에 이들에 대한 통계를 정식으로 잡기도 어렵다. 동아시아에서 유동하던 이들은 대개 통계상 부재하는 존재들이었다. 에노모토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외화벌이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들의 열악한 생활을 오히려 부추긴 바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기록에도 이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9)
1896년 싱가폴 거주 총 1000명의 일본인 중 900명이 성매매 여성이었다. 이후 일본인들 상인과 사람들이 싱가폴에 대거 정착하자, 성매매 여성들은 이들에 의해 다시 추방되어, 대만과 중국 그리고 한국으로 흘러들게 된다. 1910년대 싱가폴은 동남아 전역으로 가라유키를 유통시키던 중심지였다.10) 싱가폴 역시 관문도시다.
1910년 대만에는 16곳의 유곽이 정비되었다. 그 중에서도 마꿍은 1945년까지 대만서 가장 성매매가 번성한 지역이었는데, 그 이유는 펑후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병참기지화, 군사요새화, 제국의 남진을 도모하는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대규모 군사력이 있었다는 것은 그 이면에 대규모 성매매가 성행했다는 사실로 연결된다. 이 문제로 발생할 성병의 통제를 위해 대만은 공창제를 도입한다. 당시 대만 본토에는 인구수 비례 공창을 도입했지만, 펑후는 인구수와 무관하게 공창제를 도입했다.11)
1896까지는 일본 민간인이 대만을 왕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로 대만 여성이 성매매를 하게 되었는데, 이후 민간인에게 대만 도항이 허가되자, 대만여성이 일본여성으로 대체되기도 했다.12) 이런 관성이 이후 일본인의 대만 매춘 관광 산업으로 확장되고, 일본과 대만의 수교가 단절되자, 일본은 한국으로 매춘 관광을 오게 된다. 한국의 부산에는 완월동이 있었다. 덕분에 완월동은 동양최대 성매매 집결지가 된다.
한센인의 사례도 일본-한국-대만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대만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현실을 공히 겪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과 대만은 서양선교사들이 먼저 한센인 요양소 설치했다는 점이 유사하다. 이는 일본의 경우 관공립 요양소가 많았던 반면, 조선과 대만은 관립(국립) 요양소는 하나뿐이었다는 점도 그렇다. 이는 일본 제국의 권력과, 서양의 권력이 식민지 개척을 놓고 서로 견제 관계에 있었음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식 강제 격리 정책을 따르다가, 상대적 격리로 전환한 반면, 대만은 일본의 절대적 격리 체제를 충실히 따라간다. 동아시아 해역에서 서발터니티는 이토록 권력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만큼 그 권력을 반영했다.13)
이처럼 관문도시와 서발터니틱한 존재들은 긴밀한 연관이 있다. 기록되고 보이지 않던 그들이 늘 먼저 있었다. 그리고 권력은 ‘안전’을 빌미로 그들을 치명적 상황으로 내 몰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으로 삼는 데 가차 없었다. 관문도시는 이 배제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내밀린 서발터니티 이면에 전복의 힘이 도사리고 있다. 미-비-불(未-非-不)의 존재로서 서발터니티가 비록 배제, 낙인, 추방이라는 겹겹의 부재처리로 인해, 기존 폭력을 스스로 감내하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만큼 이면에 자신을 부재 처리한 존재의 폭력을 폭로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 나는 이 힘을 ‘임계적 공공성’이라 표현한다. 문제는 그 전복의 힘이 특유의 취약성으로 인해 제대로 발휘되거나 응답받을 여지를 얻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발터니틱한 존재’는 이런 비극적 상황을 상례로 여기며 살 수 밖에 없다. 서발터니틱한(subalternitic) 삶은 언제든 생사여탈의 상황에 빠질 수 있다.14) 벤야민이 언급한 예외상태가 상례가 되었다는 언급을 생각하면, 이런 위기는 특정한 삶만이 겪는 위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서발터니틱한 존재와 이들의 피해는 우리 삶 전반이 부당함을 증언하는 생의 경종이라 하겠다. 그 경종을 고병권은 이렇게 표현했다. “장애인 한 명이 마음 편하게 출근길 버스를 타려면 사회의 기본 이념과 체제를 몽땅 바꾸어야 한다.”15) 우리는 이 문장에서 사용된 몇 가지 말에 주목해야 한다. ‘기본’이라는 말과 ‘몽땅’이라는 말, 그리고 그냥 ‘버스’가 아니라 ‘출근길’ 버스라는 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장애인들은 너무나 쉽고 간편하게 ‘출근하지 않는 시간의 버스’를 상상한다. 취약한 존재의 치명적 삶에 근본적이고 전복적인 힘이 내재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매매 여성과 한센인 역시 동아시아 관문도시를 이동하면서 또는 특정 도시에 감금된 채 온몸으로 국가의 폭력과 초국가적 폭력을 드러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다양한 장소(지역-도시-국가-아시아-지구)의 폭력을 폭로한 것이다. 나는 그 이면에 서구중심의 가부장주의(Occidental paternalism)가 도사리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아울러 이 메타 구조 때문에 논리적으로 결부될 수 없을 정도로 독립적인 두 체계(국가 체계와 시장 체계)가 서로 공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공모의 최 외곽에 바로 서발터니틱한 존재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관문도시는 그런 존재를 향한 폭력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새기고 있다.
최근 이런 문제를 다루는 두 책이 조만간 출간된다. 그 중 하나는 동아시아 관문도시 읽기고, 다른 하나는 『근대 동아시아 국가와 도시, 서발터니티 존재들』이다. 이 두 책은 관문도시를 독해할 때, 가장 취약한 존재(the subalternitic)도 떠올려 보라고 제안한다. 이 두 책은 동아시아 관문도시를 독해할 때, 우리가 거주하는 구체적 장소에서 서발터니틱한 존재들에 가해지는 폭력에 민감해지라고 한다. 그리고 그 유사한 폭력이 동아시아의 다른 관문도시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다는 것도 상기하기를 바란다. 이 두 개념 쌍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이처럼 동일한 폭력을 행사한 거대한 이면의 실체를 응시할 수 있고, 새로운 평화를 동아시아에 불러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평화는 바로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서발터니틱한 존재를 환대(hospitality)하는 일이다. 그 희미한 절규에 응답(response)할 수 있음(ability)이 동아시아 기존 주체의 책임(responsibility)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들을 배제하는 데 암묵적/명시적으로 동의하며 지내왔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들을 환대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우리가 딛고 있는 물리적/비물리적 지평을 전적으로 쇄신하는 일이다. 기득권자와 주체의 자리를 스스로 뒤엎고 이들을 영접(hospitality)하는 일이 ‘레비나스’가 언급했던 환대의 급진성이었다.
이 급진성은 내가 자리하고 있는 장소, 특히 국가라는 프레임을 넘어 장소와 장소, 관문도시와 관문도시 사이의 새로운 연대를 촉구하는 일로 확산될 수 있다. 나는 이처럼 취약한 존재들에 대한 응답에서 출발하는 연대로 동아시아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연대라는 가능성을 감히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출발이 동아시아에서 치명적 폭력을 겪던 존재들을 환대하는 일이다. 이 환대를 통해 동아시아 ‘관문도시’를 새롭게 독해하는 일이 이어져야 한다. 나아가 동아시아 각 관문도시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의 긴장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기존 국가 중심적 동아시아 해석을 넘어서 생사여탈의 위기에 처한 존재들을 살리는 일이다. 이를 통해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더 격해지기만 하는 국가 간의 혐오와 대결을 넘어갈 새로운 힘에 주목할 수 있다. 새로운 동아시아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나는 카프카의 짧은 소설 「돌연한 출발」을 상상한다.
1) 서발터니티라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 김동규, 2023, 「서발터니티라는 방법」, 「인문사회과학연구」 제24권 제3호.
2) 문인수 시인의 <이것이 날개다>라는 시의 한 구절
3) 한계, 경계, 임계로서 비판에 대해서는 김동규, 「임계의 철학: 잠재성의 의미론」, 「철학연구」 171집, 대한철학회, 2024, 52쪽 참고.
4) 게오르그 짐멜(김덕영 외 역),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서울, 2005, 265-270쪽 참고.
5) 사카이 다카시(김은주 역), 「폭력의 철학: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산눈, 2007, 113쪽.
6) 위의 책, 119쪽, 121쪽 참고.
7) 위의 책, 124쪽 참고 또는 인용.
8) 김동규, 2023, 「서발터니티라는 방법」, 「인문사회과학연구」 제24권 제3호, 383-392쪽.
9) Sookyeong Hong, 2018, “Toward a Gentleman’s Overseas Community: the Abolition of Japanese Brothels in Singapore, 1910 1920”,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제19호, pp. 48-49 참고.
10) 위의 논문, pp. 45-47 참고.
11) 대만의 사례와 유사하게 부산의 성매매 문제도 군사도시화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전성현, 2018을 참고.
12) 진정원, 2016, 「일제 초기 대만의 마꿍 유곽 설치 과정 연구(1896-1913)」, 사회와 역사 110집, 281-295쪽 참고.
13)정근식, 2002, 「동아시아 한센병사 연구를 위하여」, 「보건과 사회과학」 제12집, 17쪽, 34쪽 참고. 또는 김동규, 2025, 「한센인, 서발터니티(subalternity)의 지정학: 부산의 경우」, 철학연구」, 105-130쪽 참고.
14) 이에 대해서는 김동규, 2023과 이홍규, 김동규, 2024, 「새로운 동아시아 담론을 위한 서설(序說): 방법으로서 관문도시와 동아시아 서발터니티」, 동아연구 제43권 1호(통권 86집)를 참고.
15)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4280300035 고병권, <장애해방 전선의 전사들>, <경향신문> 2023.04.28.